화천지수의 충절을 지킨 정환직·정용기 양세의병장
 
 도서분류 전기 평전
지은이 : 권영배
옮긴이
면 수 : 236
:  \14,000
출간일 : 2018/12/14
판 형 : 신A5
ISBN : 978-89-423-9056-4 04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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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주문권수 입력:
 책 의   줄 거 리 ( 머 리 말 )

머 리 말

 

 

올해는 2018년 무술년이다. 산남의진(山南義陣) 총수 정환직과 창의대장 정용기 부자 의병장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지 꼭 111년이 되는 해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무너지려 할 때, 의병이란 이름으로 나서서 싸우다가 1907년 정미년에 순국했으니 말이다. 나라가 위급할 때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이가 어디 한둘이겠느냐마는, 정환직과 정용기 의병장의 경우는 다르다. 고종의 밀명을 직접 받들고 일어났다는 점이 다르고, 아버지와 아들이 의병장으로 나서서 일본군을 상대로 줄기찬 항쟁을 펼쳤다는 점이 또한 다르다. 

아버지 정환직 의병장과 아들 정용기 의병장을 가리켜 우리는 ‘양세의병장(兩世義兵將)’이라고 한다. 부모와 자식 두 세대를 ‘양세(兩世)’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들 양세의병장이 지휘했던 의병부대가 ‘산남의진’이다. 의진의 첫 단계 목표는 강원도 강릉, 곧 ‘관동으로 북상’하는 것이었고, 다음 단계는 다시 서울로 진격하는 것이었으며, 마지막 단계는 일제통감부와 역적 간신들을 몰아내고 우리 임금을 구하고 나라를 지키는 것이었다. 실제 양세의병장은 항쟁 기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관동으로의 북상’에 애를 썼지만, 운수는 우리 편이 아니었던지 끝내 길을 열지 못하고 작전 첫 단계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그렇더라도 ‘산남의진’은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의병부대였고, 이들이 전사한 뒤에도 유지를 받든 최세윤 의병장과 장령들이 항쟁을 계속 이어갔다.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을 이야기할 때 당연히 ‘양세의병장’이나 ‘산남의진’에 대해서도 담론이 많을 법도 한데,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여 아쉽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신돌석이나 이강년 의병장과 같은 그런 전술·전략을 일구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정환직·정용기 의병장이 ‘고종의 밀지’를 받들고 일어난 ‘양세의병장’이었던 것만으로도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말 의병사에서 ‘양세의병장’이 일어나 구국투쟁을 벌인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양세의병장과 관련된 자료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산남창의지(山南倡義誌)》(1946)와 《산남의진유사(山南義陣遺史)》(1970)이다. 그러나 이들 자료는 모두 광복 이후에 나온 것으로, 내용은 풍성하지만 살펴볼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의문이 드는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진중일지(陣中日誌)》(2010)라는 일본군의 전투일지가 소개되면서, 양세의병장과 관련한 많은 의문이 풀리고 있다.

양세의병장의 문집도 발간되었다. 《영남문집해제》(영남대출판부, 1988)에는 정환직의 《동엄집(東嚴集)》(8권 5책)과 정용기의 《단오집(丹吾集)》(9권 5책)이 소개되어 있다. 목차의 내용은 《산남창의지》나 《산남의진유사》의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 이 두 문집은 모두 석판본(石版本)이고, 그 크기나 활자 배치로 보아 같은 시기에 출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문집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목차로만 보아도 문집의 윤곽은 어느 정도 짐작된다. 

필자는 양세의병장과 산남의진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올해 양세의병장 순국 111주년을 맞으면서 양세의병장에 대한 관심을 좀 더 확산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는 판단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아무쪼록 이 책이 정환직·정용기 양세의병장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한 가지 짚어 둘 것은 이 글에서 나오는 지명 문제이다. 양세의병장이 활동하던 당시의 지명과 문헌자료에 나오는 지명, 그리고 오늘날 행정구역상의 지명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명에 대한 이야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예를 하나 들자면, 양세의병장의 활동 중심지였던 ‘죽장’이라는 지명이 문헌에 자주 나타난다. 그런데 의병항쟁 당시 행정구역에 ‘죽장’이라는 지명은 없었다. 당시에는 이곳이 ‘청하군 죽남면’ 또는 ‘청하군 죽북면’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죽장’이라 했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동래부 경주군 죽장면(1895), 경북 청하군 죽북면·죽남면(1906.9.24.), 영일군 죽북면·죽남면(1914), 영일군 죽장면(1934), 포항시 북구 죽장면(1995)으로 계속 변천되었기 때문에 여간 혼란스럽지가 않다. 양세의병장과 관련된 문헌자료가 거의 다 1945년 광복 이후에 쓰인 것이다 보니 더욱 그렇다. 이 글에서는 가능한 한 당시 지명을 쓰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말해 두고자 한다. 

이 책이 나오도록 주선하고 협조해 주신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김희곤 관장님과 학예연구부 강윤정 부장님, 한준호 차장님, 신진희 연구원 등 관계자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어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출간을 기꺼이 맡아 주신 지식산업사 김경희 사장님과 책이 나오도록 글을 다듬어 주신 편집부 분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이 글에서 행여나 잘못 이야기된 부분이 있더라도 그 책임은 오로지 글쓴이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많은 양해를 바란다.

 

 

2018년 12월

양세의병장 순국 111주년을 맞으면서

 

권 영 배 

 

 서 평 / 저 자(편 집 부)로부터의 글

 

 몸은 죽어도 마음은 변치 않으리

의리가 무거우니 죽음은 오히려 가볍구나

-정환직, 임종시에서

나라에 목숨을 바친 부자를 돌아보다

 약 30여 년 전부터 산남의진과 양세의병장에 대해 연구해 온 권영배 교수가 의병장 정환직·정용기 부자에 대한 최초의 평전을 펴냈다. 지금까지 이들만을 총체적으로 고찰한 연구는 거의 없었으며, 아버지와 아들 2대에 걸친 의병장임을 일컫는 양세(兩世)의병장이라는 호칭조차 일반 대중에게는 낯설게 다가오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창의(倡義)가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아 이루어졌으며, 이들이 이끌었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의병부대였다는 점에서 그 활약상을 조명하는 일은 의병사 연구에서 필수일 것이다. 이에 지은이는 사료로써 정환직·정용기뿐만 아니라 정 부자 사후 산남의진을 이끈 정환직의 후계자 최세윤의 삶과 투쟁을 생생하게 복원해 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인물총서 열다섯 번째 책으로 출간됨으로써 우리 독립운동사의 또 다른 위인을 본격적으로 추적·발굴해 냈다는 점이 더욱 뜻깊다.

양세의병장의 활약에 담긴 선조의 정신

 지은이는 충절의기라는 양세의병장의 곧은 신념의 뿌리를 영일정씨 가문의 풍토에서 찾아낸다. 고려 충신 형양공 정습명, 포은 정몽주부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강의공 정세아와 그 아들 정의번 등, 시대를 관통하는 충직의 가풍 아래 성장한 것이 이들의 행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양세의병장은 위로 임금을 섬기면서 시국 극복 방안을 제시하며 역적·매국노를 규탄하는 데 앞장서고, 아래로는 민심을 살피고 앞장서서 독려하여 기울어 가는 나라를 일으키고자 힘쓸 수 있었다. 우리 민족과 나라의 존립에 대한 이 같은 염원은 양세의병장의 여러 일화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정환직은 삼남도찰사 겸 토포사로서 곳곳을 시찰하면서 백정과 같은 천민의 목소리에까지 귀를 기울였고, 정용기는 의병 모집에 앞서 먼저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애썼다.

죽음을 무릅쓰고 받든 화천의 물

 나라에 대한 양세의병장의 강직한 충성심은 정환직이 고종으로부터 직접 밀명을 받는 순간 단적으로 표출된다. 바로 경이 화천의 물을 아느냐는 고종의 한마디였다. 화천의 물, 화천지수(華泉之水)’는 주군과 옷을 바꾸어 입고 화천에서 물을 떠 오라고 시킴으로써 위기 상황에서 주군을 탈출시키고 대신 죽은 중국 제나라 경공의 호위장군 봉축보에 얽힌 일화를 일컫는다. 일제의 엄중한 감시로 직접 나설 수 없었던 고종이 중국 고사를 인용하여, 가장 믿을 수 있었던 신하에게 나라를 구하라고 명한 것이다.

 정환직은 자신이 봉축보와 같이 끝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밀지를 받자마자 사직하고 창의를 준비했다. 정용기는 자신이 의병을 모집하러 내려가겠다고 간청해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냈다. 당시 일제는 대규모 병력과 신식 무기를 총동원하여 의병 전면 토벌에 나섰고, 셀 수 없이 많은 의병들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듯 죽어 나갔음에도 이들은 굴하지 않고 전투를 계속해 갔다. 따라서 그 진정한 원동력은 열성조의 은혜를 가장 많이 누려 온 사족(士族)”으로서 임금의 명을 받들어 나라를 지킨다는 대의(大義)였음이 명백해진다.

지금 양세의병장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양세의병장의 뚜렷한 활약상은 일본군 측의 문헌에서도 확인될 정도다. 한 예로, 당시 연합작전을 펼쳤던 일본군 부대 사이에서는 백발노인이면 정환직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1천여 명 규모였을 것으로 추산되는 산남의진에서 현재 이름이 제대로 밝혀진 사람은 2~3백 명가량에 지나지 않는다. 양세의병장에 대한 이번 연구는 미처 사료에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한 의병들의 업적을 찾아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나 다름없다. 양세의병장 순국 111주년인 2018년 바로 이 시점에서,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본보기로서 기리는 것은 지금 이 땅에 사는 자로서 가져야 할 책무라 할 것이다.

 

 목    차

 

머리말  5

 

제1장  양세의병장의 가계와 삶 ………13

1. 충절가문의 전통을 잇다  15

2. 동엄공이 태의원 전의로 관직생활을 시작하다  23

3. 단오공이 검계서당에서 학문을 깨치다  49

 

제2장  정용기 의병장의 항쟁 ………59

1. 친명을 받들고 의진을 일으키다  61

2. 대구경무서에 구금되다  83

3. 영천군 국채보상운동을 이끌다  96 

4. 의진을 다시 일으키다  103

5. 입암전투에서 전사하다  129

 

제3장  정환직 의병장의 항쟁 ………143

1. 아들을 대신하여 의진을 이끌다  145

2. 북상길을 트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다  154

3. 청하 고천에서 잡혀 영천에서 순국하다  173

4. 장령들의 활동이 계속 이어지다  190

 

제4장  최세윤의 양세의병장 유지 계승 ………197

1. 안동의진 아장으로 출발하다  199

2. 정환직 의병장의 유지를 계승하다  201

3. 장기에서 잡힌 뒤 서대문 옥중에서 순국하다  212

 

맺음말  215

양세의병장 연보  220

참고문헌  228

찾아보기 ​ 230

 

 저  (역)   자   약   력

 

권영배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과에서 교육학석사학위를, 대학원 사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계성중학교 수석교사와 계명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경북대학교 외래교수이다.

​대표 저서로 안동 지역 의병장 열전(지식산업사, 2012), 경북독립운동사》Ⅰ-의병항쟁(공저, 경상북도, 2012), 경북독립운동사》Ⅲ-3·1운동(공저, 경상북도, 2013), 영천의 독립운동사(공저,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 2013), 국난극복기 성주의 대응과 극복(공저, 성주문화원, 2018)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