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덕과 화담학파
 
 도서분류 전기 평전
지은이 : 한영우
옮긴이
면 수 : 412
:  \22,000
출간일 : 2022/02/04
판 형 : 신국판
ISBN : 978-89-423-9103-5(0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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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의   줄 거 리 ( 머 리 말 )

  조선시대 500년을 시대구분할 때 왜란을 경계로 하여 전기前期와 후기後期로 나누고 있으나, 이는 각 시기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적당한 방법이 아니다. 조선 중기를 설정하여 세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조선시대 변화과정을 이해하는 데 한층 더 설득력이 있다.

  조선 초기는 유학과 실용학기술학을 통합하고, 유불선儒佛仙도 통합한 문교정책으로 국력이 커지고 민생이 안정되었으나, 중기는 중쇠기中衰期로 불리는 난세로서 국력과 민생이 무너져 가던 시기였다. 뜻있는 지식인들은 당시의 국가를 담이 부서지고 기와가 깨진 낡은 집土崩瓦解에 비유했다. 또 중병이 든 환자에 비유하기도 했다. 용한 목수가 와서 수리하고, 명의가 와서 치료하지 않으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진단했다.

  온건개혁파는 경장更張을 부르짖고, 급진개혁파는 혁명革命을 내걸고 수구세력과 대결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경장도 실패하고 혁명도 실패하여 사화士禍, 왜란倭亂, 호란胡亂의 참화를 입었다. 조선 중기를 상징하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상처들이었다.

조선 후기는 왕조중흥의 회춘기였다. 중기에 실패한 경장更張을 되살려 국력과 민생을 상당한 정도로 회복한 시기였다. ‘중쇠가 있었기에 이를 극복한 중흥이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19세기에 세도와 민란의 시대로 후퇴한 가운데 산업화된 외세와 만나 근대화를 시도하다가 실패한 것이다.

  역사의 흐름에는 기복이 있고, 춘하추동과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반복이 있다. 정치사로 보면 조선 중기는 중쇠기의 병증病症을 앓던 시대였지만, 사상사로 보면 이를 치유, 극복하려는 새로운 학문과 사상이 기라성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대낮에는 태양만 밝게 보이고 별들이 보이지 않지만, 어둠이 내리면 뭇별이 반짝이는 이치와 같다. 태양이 임금이라면 뭇별은 신하들이다. 시대가 밝았던 창업기와 중흥기에는 임금이 더 빛나고, 어둠이 내린 중쇠기에는 반대로 임금보다 신하들이 더 빛났다.

  조선시대는 시종일관 주자학朱子學에만 매달려 온 것으로 이해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창업기에는 ‘10十學이 발달했는데, 유학儒學은 그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실용적 기술학들이었다. 유학은 성리학性理學을 말하지만, 중국 성리학에도 경제실용을 강조하는 사공학파事功學派와 수기修己를 강조하는 도학파道學派가 있었다. 주자는 그 가운데 도학파에 속했고, 북송의 주돈이(周敦頤; 濂溪), 소옹(邵雍; 康節), 장재(張載; 橫渠), 남송의 진량陳亮 등은 사공학파에 속했다.

  조선시대 성리학도 여러 유파가 있었다. 창업기의 성리학은 도학보다는 사공학에 더 가까웠고, 그것이 무학武學, 천문天文, 지리地理, 음양복陰陽卜筮, 역학譯學, 의학醫學, 산학算學, 율학律學, 이학吏學, 자학字學, 화학畫學, 악학樂學 등 기술학과 합쳐져 국력과 민생의 안정을 가져왔던 것이다.

  국가 운영에는 실용학도 중요하지만, 도덕성을 높이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했다. 그 도덕성을 높이는 데에는 유교 경전도 도움이 되지만,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불교나 민간신앙의 풍속에도 아름다운 도덕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 경제적 폐단만 제거하면 얼마든지 도덕문화로 수용할 가치가 있었다. 불교에는 탐욕을 억제하고 자비를 숭상하는 미덕이 있고, 민간신앙과 풍속에는 향도香徒나 두레등에서 보이는 공동체문화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미덕이 있었다. 또 천지인天地人을 하나의 생명공동체로 바라보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역철학易哲學도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세종을 비롯한 초기 임금들은 유불선儒佛仙을 하나로 통합시킨 삼교회통三敎會通을 통해 전통문화에 길들여진 백성을 넓게 끌어안았다. ‘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창조물은 ‘10삼교회통문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지 성리학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다.

  조선 중기에 들어가면 학문과 사상에 변화가 나타났다. 연산군의 폭정과 뒤이은 사화士禍를 경험하면서 성리학의 중심이 수기修己를 강조하는 도학道學으로 기울어졌다.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 등의 학문이 그러했다. 그러나 도학만으로 국가를 재건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한계가 드러나고, 더욱이 일반 선비들은 입으로는 도학을 말하고 몸으로는 이욕을 탐하면서 도학을 출세의 수단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했다.

  고통에 시달리던 서민층을 대변하는 지식인들은 도덕도 중요하지만 경제실용을 겸비하고 삼교를 통합한 새로운 지도이념을 만들어 중쇠기의 병증을 치료하는 대안으로 들고 나왔다. 그 선구자가 바로 중종 때 개성의 서경덕徐敬德이다. 선조 때 개성에서 가까운 파주의 율곡 이이李珥 등은 이를 계승 발전시키고, 선조 말-광해군 초에는 서울의 성시산림城市山林을 자처하는 수십 명의 침류대학사枕流臺學士들이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서울학풍을 바꾸어 놓았다. 그 가운데 유몽인柳夢寅, 한백겸韓百謙, 이수광李睟光, 허균許筠 등 실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도학파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활발했으나, 경제실용과 삼교통합의 실학파에 속하는 서경덕과 화담학파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매우 부진했다. 그 이유는 그 후손들이 빈약한데다 그 유적지가 휴전선 북쪽에 있고, 그 영향을 받은 동인, 근경 남인, 그리고 호남 선비들이 정치적으로 몰락한 데 있었다.

  서경덕과 그를 따르던 화담학파에 대한 연구 부진은 조선 중기 사상사를 불모지不毛地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자학의 영향만이 실제 이상으로 크게 부각되어 왔다. 주자학이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호란胡亂 이후의 일이다. 여진족 후금後金에게 수모를 당하고 남천南遷한 남송 주자학자의 정서와, 호란으로 여진족에게 수모를 당한 조선 선비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주자학이 맹위를 떨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호란 이전까지는 주자학의 영향력은 제한되어 있었고, 이단적異端的인 조류가 오히려 중기의 시대정신에 만만치 않은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특히 서경덕과 화담학파의 정치적 위상과 사상적 영향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서경덕의 공적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가난한 평민 출신이면서도 우주자연의 근본을 물질적인 기에서 찾고 그 기가 움직이는 변화를 수학數學으로 설명하는 이른바 상수역학象數易學을 거의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학자이다. 가장 어려운 과학철학의 선구자라 할 만하다. 그의 상수역학은 과학성을 띠고 있기에 경제실용의 실학實學으로 발전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둘째, 서경덕은 비록 짧은 글이긴 하지만, 경기도 백성의 땅이 왕릉땅으로 빼앗기고, 왕릉의 석물石物 때문에 백성들이 받는 고통을 호소했으며, 임금이 왕실 재정을 사유화하고 있는 것은 주례周禮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가 뒷날 경세지재經世之才가 있다고 평가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고, 화담학파에서 이지함李之菡, 유몽인柳夢寅, 한효순韓孝純, 한백겸韓百謙, 허균許筠, 유형원柳馨遠, 윤휴尹鑴, 허목許穆, 이익李瀷 같은 남인 실학자들이 배출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째, 서경덕은 도학道學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았으나, 도학은 이미 수많은 유교 경전儒敎經典에 정립되어 있다고 보고 굳이 연구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불교와 민간신앙 등에도 도덕규범이 있으므로 이를 포용했다. 유교의 가치가 가장 높지만, 불교나 선교仙敎, 민간신앙 등에도 미덕이 있다고 여겨 유불선 삼교일치의 통합문화를 몸으로 실천했다.

  서경덕은 평소 개성과 지리산, 속리산, 금강산 등지의 승려와 수련도인修鍊道人들을 만나 교유하고, 장자莊子를 읽기도 했다. 뒷날 한무외(韓無畏, 1517~1610)가 지은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이나 홍만종洪萬宗해동이적海東異蹟에서 서경덕을 우리나라 수련도교의 도통을 이은 인물로 넣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넷째, 서경덕의 상수역학은 훈민정음의 성음구조聲音構造를 처음으로 역학易學으로 해석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조선 후기 신경준申景濬 등의 훈민정음 성음 연구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다섯째, 서경덕은 조선 중기를 풍미한 당시唐詩의 선구자였다. 주리설主理說을 따르는 도학파들은 이성理性과 도덕을 강조하는 송시宋詩를 선호했으나, 서경덕과 화담학파는 인간의 타고난 감성感性, 곧 천기天機를 강조하면서 사회비평의 성격을 지닌 당시唐詩를 선호했다.

  《화담집에 담긴 서경덕의 글은 대부분 시들이다. 그 시들은 대자연에서 원형이정元亨利貞으로 반복되는 생명의 영원함과 아름다움을 노래하면서, 여기에 노장적老莊的인 정서를 담고, 나아가 오염된 정치를 풍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선 중기를 풍미한 당시唐詩의 대가들이 대부분 화담학파에서 배출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경덕은 문학사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이다.

  여섯째, 서경덕과 화담학파는 서민사회를 대변하는 진보적 사상가들이고 그들의 사랑을 받은 벗들이기도 했다. 황진이黃眞伊는 자신과 서경덕과 박연폭포를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러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서경덕은 서민의 참벗이기도 했다. 그의 문인들 일부는 서울과 근교의 양반자제들이기도 했지만 낙백落魄한 집안 출신이 적지 않았고, 서얼이나 일반 평민이 적지 않았다. 야사野史에 수많은 일화를 남긴 것도 그를 사랑하는 서민들의 입을 통해서였다.

  서경덕 문인들 가운데 양반 출신 문인들은 대부분 뒤에 높은 벼슬아치로 출세하여 명종 때 훈척들을 비판하는 청류로 활동하고, 선조 이후에는 동인東人과 근경 남인南人으로 큰 활동을 벌였으며, 서얼이나 서민 출신들은 서울과 그 인근 지역, 또는 호서와 호남지역에서 교육자로, 시인으로 큰 활동을 벌여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당색으로 본다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후학들이 서인西人이 되고, 조식 문인들이 대북大北으로 되었다가 인조반정 뒤에 크게 몰락하고, 이황李滉 문인들은 영남 남인으로 뿌리를 내렸다.

  서울지역 학문은 서경덕과 이이의 학풍이 주도하여 실학으로 발전하고, 18세기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파洛派로 불리는 서울 노론들이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을 같다고 보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한 것도 서경덕과 이이의 주기론과 관계가 깊다. 북학北學이 서울 노론에서 발생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비록 서경덕에게 직접 배운 문인은 아니더라도, 그를 사숙하면서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받은 학인들이 선조 말년과 광해군 초에 큰 시인 동아리를 형성한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른바 침류대학사枕流臺學士들이다. 서경덕 문인 남언경南彦經의 제자로 서얼 출신이었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 창덕궁 왼편 계곡에 살면서 장안의 청류 선비들을 모아들여 시사詩社를 결성했는데, 그 구성원들이 수십 명에 이르렀다.

침류대학사들은 조식曺植이나 정인홍鄭仁弘을 대표로 하는 재야산림과 구별하여 스스로 성시산림城市山林으로 자처했다. 이들은 광해군정권이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제거하는 정책을 반대하다가 쫓겨나자 서울 근교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여 실학자實學者 또는 양명학자陽明學者로 성장하기도 하고, 일부는 인조반정 후 재기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청류淸流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백겸韓百謙, 이수광李睟光, 유몽인柳夢寅, 신흠申欽, 이식李植, 장유張維 등이 그렇다.

 ‘중쇠기의 난세로 불리던 조선 중기에 샛별처럼 나타나, 정치, 철학,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새 바람을 일으킨 서경덕과 그를 따르던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화담학파를 형성하여 서울 학풍을 일변시킨 점, 그리고 그 유산이 조선 후기 왕조중흥의 한 축을 형성했다는 점은 마땅히 재평되어야 할 것이다.

 

  

20216

관악산 기슭 호산재에서

한 영 우 쓰다

 

 서 평 / 저 자(편 집 부)로부터의 글

자연을 품은 서경덕, 기와 이, 천지인의 혼연일체를 보다

  

  우리 철학사에서 기철학을 세운 화담 서경덕(1489-1546)과 그의 문인들을 본격적으로 다룬 역작이 나온다. 한영우 교수는 화담학파의 발자취를 조명함으로써 조선 중기 유학사의 새로운 흐름을 꿰뚫어 본다. 개성에서부터 넘어온 새 물결은 흑백의 모노톤이었던 조선의 문화, 사상계를 다채롭고 역동적으로 물들인다.


자연에서 만물의 근원 기氣를 발견한 소년  

 

  서경덕의 독창적 사유의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그 원천으로 우선 그가 태어난 환경을 든다. 가난한 몰락양반가 후손으로 들판에서 뛰놀았던 서경덕은 문득 종달새가 나는 것을 보고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다.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몸소 실천하여 이치를 터득한 일례이다. 그는 우주자연의 근본을 기에서 찾고 그 기가 움직이는 변화를 수학으로 설명하는 이른바 상수역학象數易學을 독창적으로 발전시켰다. 저자는 그와 함께 서경덕의 고향 개성에 주목한다. 16세기 중엽 개성은 상업도시이자, 실용학(잡학雜學)과 도술이 성행하는 등 삼교일통문화가 꽃피는 토양이 되었다. “산술, 역학에 능한 과학자의 눈과 시인의 감성을 동시에 가진서경덕의 시와 학문은 여기서 탄생하였다.

  

천지인, 이기, 그 경계를 넘나들다

 

  저자는 화담집송도기이, 실록, 족보, 비명, 문집, 역학서 등과 서경덕유사등의 야사를 통틀어 서경덕의 성품과 학문세계를 명쾌하게 밝힌다. 그가 남긴 여러 기록 가운데 특히 시는 서경덕의 진면목을 한눈에 보여 준다. 당대 최고 명신 김안국이 부채를 선물하자 지은 시에는 바람의 이치를 기철학으로 절묘하게 풀이한다.

 

누가 알까. 하나의 근본이 머리까지 꿰어        誰知一本當頭貫

문득, 뭇 가지 한 줄기에서 퍼졌네                 便見千枝自幹張

형체가 부딪쳐 가 와서 부풀려지니           形軋氣來能鼓吹

깊은 고요 속 홀연히 시원한 바람 생기네          有藏虛底忽通凉

  

개성-서울학풍 속으로

 

  49세 때 개성에서 서울로 잠시 근거지를 옮긴 서경덕의 명성을 듣고 각지에서 제자들이 찾아온다. 당시 학도들이 유명한 학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배우는 서울의 학풍을 엿볼 수 있다. 다양한 실용학과 기술이 포함된 개성문화는 조선 중기 도학 일변도를 막으면서 다변화의 물꼬를 텄던 것이다. 이 새로운 지식공동체는 상수역학에 능하고 유불선 일통의 스승의 영향을 받아 화담학파를 이루었다. 저자는 이지함, 허균 이외에도 민순, 이구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제자들을 살피는 한편, 서경덕 문인록에 수록되지 않은 인물들의 삶과 행적까지 추적한다. 이로써 실학의 뿌리를 켜켜이 훑는다.

 

  누추한 띠집에서 때로 굶주렸던 그였지만, 그 누구보다 드넓은 세상 이치를 환하게 꿰뚫었던 현자, 서경덕. 그가 복숭아 지팡이를 짚고 곳곳에 뿌린 씨앗은 쇠락해 갔던 조선의 학풍을 되살리는 신선한 샘물과도 같았다. 저자가 평생을 두고 깊이 고찰하여 써내려간 화담花潭의 반향은, 실학의 연원을 새로 보는 데서나 기철학, 상수역학 등 철학사를 다시 쓰는 데 긴요한 주제와 자료가 될 것이다.

 

 

 

 목    차

들어가면서 4

화보 11

 

1편 서경덕 평전 17

 

1. 서경덕의 일생 18

 

1) 16세기 중후반 개성문화의 새바람_18 /2) 서경덕의 가계家系와 조상의 직업_24 /3) 서경덕 3대조의 품행과 염원_29 /4) 서경덕의 어머니와 아내_31 /5) 두 아우의 도술道術을 걱정하다_36 /6) 소년기에 종달새가 나는 것을 관찰하다_42 /7) 개성 성균관을 거쳐 43경을 독학으로 배우다_43 /8) 19세에 장가들고, 과거 준비와 학문 연구를 병행하다_47 /9) 34: 변산, 지리산, 속리산, 금강산 등 명승지를 유람하다_50 /10) 황해도 여러 지역을 유람하다_62 /11) 43세에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다_66 /12) 47: 개성 유수 이구령과 교유하다_68 /13) 48-50: 서울에 와서 문도들을 만나고, 나식, 김안국 등과 교유하다_70 /14) 52세 무렵: 화담정사花潭精舍를 짓고 강학을 시작하다_77 /15) 문인들과 만날 때의 일화들_80 /16) 54: 개성 유수 박우朴祐와 그 아들 박순朴淳, 조욱趙昱과 교유하다_90 /17) 56(1): 개성 유수 이찬과 교유하다_96 /18) 56(2): 5월 후릉厚陵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사직하다_98 /19) 56(3): 건강 악화, 광한, 심의 등과 교류하다_101 /20) 56(4): 중종 승하, 복상服喪과 국장國葬을 비판하는 상소문 작성_111 /21) 57: 역학易學에 관한 글과 시를 쓰다_114 /22) 58: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한 뒤 세상을 떠나다_126 /23) 야사野史에 보이는 서경덕의 이모저모_132 /24) 선조 8(1575)에 우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를 받다_137 /25) 화곡서원花谷書院이 설립되고, 문묘종사운동이 일어나다_145 /26) 화담집편찬 경위_147

 

2. 서경덕의 학문: 상수역학 153

 

1) 상수역학象數易學의 뿌리: 동이족의 역학易學과 선교仙敎_153 /2) 해동전도록해동이적에 오른 서경덕의 삼교회통_157 /3) 송나라 상수역학과 주자학_160 /4) 서경덕의 상수역학_166 /5) 서경덕의 경세관_190

 

서경덕 연보


 

2편 서경덕 문인 및 시우 열전 215

 

1. 화담 문인 및 시우들 명단 216

 

1) 화담집에 보이는 문인_216 /2) 화담집에 보이지 않는 문인(6)_217 /3) 서경덕 시우詩友_217

 

2. 문인록에 보이는 문인 열전 218

 

1) 행촌杏村 민순閔純_218 /2) 사암思庵 박순朴淳_221 /3) 초당草堂 허엽許曄_231 /4) 슬한재瑟僩齋 박민헌朴民獻과 박여헌朴黎獻 형제_248 /5)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_257 /6) 치재恥齋 홍인우洪仁祐_301 /7)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_305 /8) 연방蓮坊 이구李球_308 /9) 동강東岡 남언경南彦經_311 /10) 최력崔櫟_314 / 11) 김혜손金惠孫_316 /12) 신역(1521-?)_317 /3) 강문姜文佑_318 /14)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_320 /15) 척재惕齋 김근공金謹恭_322 /16) 사재思齋 장가순張可順_323 /17) 윤담수尹聃壽_325 /18) 이재頤齋 차식車軾_327 /19) 마희경馬羲慶_329 /20) 김한걸(金漢傑; ?-1583)_331 /21) 최자양崔自陽_333 /22) 이균李均과 황원손黃元孫_334

 

3. 문인록에 보이지 않는 문인들 335

 

1)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_335 /2)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_344 /3) 고청孤靑 서기徐起_349 /4) 아계丫溪 고경허高景虛_352 /5) 관물재觀物齋 민기閔箕_354 /6) 운곡雲谷 우남양禹南陽_358

 

4. 서경덕과 교유한 시우詩友 359

 

1)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_359 /2) 육봉六峰 박우朴祐_364 /3) 수곡守谷 이찬李澯_366 /4) 대관재大觀齋 심의沈義_367 /5) 보진암葆眞庵 조욱趙昱_377 /6)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_380

 

나가면서 384

주요 경력 및 저서 389

찾아보기 394

 

 

 저  (역)   자   약   력

한영우韓永愚

 

1938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를 받았다. 서울대 사학과 교수, 하버드대 객원교수, 문광부 사적분과위원장, 한국사연구회장, 서울대 규장각 관장과 인문대학장 등을 역임하고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특임교수, 이화학술원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명예교수로 활동 중이다. 경암학술상, 수당학술상, 민세안재홍상 등 학술상을 아홉 차례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정조평전: 성군의 길(·), 조선 수성기 제갈량 양성지,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 꿈과 반역의 실학자 유수원, 과거, 출세의 사다리(4), 한국 선비지성사, 역사학의 역사, 다시찾는 우리역사, 세종 평전: 대왕의 진실과 비밀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