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존재하기 위해서 일하고 일할 노동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논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한마디로 인간은 일하기 위해 노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주가 확보되면 일해서 번 돈을 먹고 마시며 노는 데 다 쓴다. 한마디로 인간은 놀기 위해 일하고, 또 노는 것이 사는 것이다. 이런 목적론적 삶의 관점에서 인간은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적 인간’, 아니 ‘유희적 동물’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

 말하자면 인간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놀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사람들은 ‘목적론’이니, ‘호모 루덴스’니 하는 어려운 말 쓰지 않고 이것을 이렇게 간단히 표현한다. “인생 뭐 있어? 한바탕 잘 놀다 가는 거지!”

이 세상에 생산적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놀기만 하는 사람, 유희만 하는 사람도 참 많다. 직업적으로 운동경기만 하는 운동선수와 골퍼, 바둑기사, 체스챔피언, 도박사, 코미디언, 개그맨, 만담가, 마술사, 서커스단 묘기꾼들, 연금생활자, 매일 공부 안하고 컴퓨터게임만 하는 청소년게이머들이 그들이다. 그들도 무대와 게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율법이 지배하는 “노동사회적 세계관(Weltauffassung der Arbeitsgesellschaft)”에 갇힌 사람들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그들을 ‘비생산적인 자들(the unproductive)’로 친다. 이런 세계관에서는 유희 또는 놀이를 기껏 노동력 회복을 위한 ‘휴양’으로 간주한다. 이런 공리적功利的 유희 관념은 착취와 굶주림에 유린되어 온 노동중심사회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착취와 궁핍이 결정적으로 완화된 ‘삶 중심 사회’의 “탈脫노동사회적 세계관(Weltauffassung der Post-Arbeitsgesellschaft)”의 목적론적 관점에서 보면, 놀이와 노는 사람들의 위상과 의미는 완전히 뒤집힌다. 유희하는 사람들은 유희와 재미, 유희적 행복을 산출하는 고마운 사람들이거나 재미와 유희적 즐거움을 즐기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이 책은 주로 삶 중심의 목적론적 탈脫노동사회적 세계관에서 유희를 바라보고 유희와 재미, 특히 유희의 최고 형태인 ‘게임’과 양편으로 나뉜 관중을 가진 게임의 연대적 재미를 중요한 행복의 원천으로 탐구한다. 올림픽게임과 월드컵, 그리고 국내의 각종 운동리그들은 모두 게임 형태로 조직되었고, 모두 크고 작은 팬덤(fandom)을 거느리고 있다. 크고 작은 게임 팬덤들은 게임을 관람·응원하고 모두 공감적 재미 또는 유희적 즐거움(행복)을 나눈다. 이렇게 팬덤을 가진 모든 게임은 국민적 행복기제인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일단 모든 ‘노는 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나아가 유희와 유희의 최고 형태로서의 게임은 힘들고 어려운 것을 가볍게 만들고 재미로 둔갑시켜 주기 때문에 노동, 예술, 도덕행위 등은 대개 유희 형태로 조직되어 있다. 유희 형태(내기, 현상금, 성과급 경쟁 등)로 조직된 노동은 힘들고 어려운 노동과정을 재미있게 만들어 그 어려움과 노고를 덜어 준다. 유혈낭자했던 정치적 권력투쟁도 게임 형태로 조직된 선거의 승패로 결정되면서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무혈로 진행된다. 오늘날은 심지어 군사훈련조차도 종종 서바이벌게임 형식으로 수행된다. 긴장·스릴·서스펜스·불확실성·요행(우연·운)·승패 등 게임의 여러 요소들은 순수예술로 생산된 문예작품과 영화작품 속에 투입되어 작품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주거나 적어도 지루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다. 영화 ‘오징어게임’이 세계를 정복하듯 게임이 천하를 정복했다. 게임은 최고 형태의 유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덕적 인물을 롤모델로 삼아 그를 흉내내면, 도덕학습과 도덕행위도 재미를 느끼는 가운데 수월해진다. 흉내(미메시스)는 유희의 기본요소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유희는 인간의 모든 행위, 곧 공리적·예술적·도덕적 행위에 널리 삼투해 있다. 이 책은 다른 사회적 행위들을 수월하게 해 주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는 ‘유희의 일반화’ 현상도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유희적 행위’의 본질은 생명력과 각종 능력의 자유로운 분출 또는 자유분방한 발휘다. ‘재미’는 오직 이 ‘유희적 행위’로부터만 나온다. 따라서 ‘재미’는 공리적 행위(노동·학습·사업·경쟁)를 통한 욕망의 충족에서 나오는 ‘기쁨’이나, 예술적 행위나 예술작품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이나, 도덕적 행위의 ‘선善’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가치다. ‘재미’의 본질은 유희적 행위의 중화中和(균형과 조화)에 대한 흡족한 느낌, 곧 유희적 행위의 짜임새와 변동을 구성지고 아기자기하게 느끼는 긍정적 감정이다. 우리는 타고난 ‘재미감각’으로 어떤 유희적 행위의 이 ‘중화’와 ‘비非중화’를 “재미있다”, “재미없다”의 감각적 판단으로 즉각 변별해 낸다.

아기자기하고 구성진 중화적 유희, 곧 재미있는 유희는 우리 인간을 무료함, 심심함, 허무함, 무의미로부터 건져내 삶에 달라붙게 만들고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해 준다. 유희와 재미의 이 마력을 파악하기 위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호이징거, 카이와, 가다머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적 고구考究들이 있었다. 최근에는 자악 팽크셉과 템플 그랜딘이 이 고구를 신경과학과 동물행태학으로까지 확장했다.

 이 책에서는 이 이론들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이 이론들은 하나 같이 모두 장점과 단점, 진리와 오류를 안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모든 이론들이 다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고, 진리보다 오류가 더 많다. 그래서 이 책을 쓸 필요가 절실했던 것이다.

유희와 재미에 대한 필자의 탐구는 2015년에 출간된 《감정과 공감의 해석학(2)》에서 처음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 시론은 지금 보니 논의내용이 불철저하고 논의범위가 좁고 자잘한 오류들이 섞여 있었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이 시론을 전면적으로 수정·보완하고 틀을 다시 짜고 이론 전체를 재구조화해 철저하게 다시 써야 했다. 그리하여 기존의 시론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새로운 저작이 탄생했다.

 아무쪼록, 시쳇말로 ‘엔조이’를 비하하는 착취자적·후진국적 노동중심사회의 세계관 속에서 멸시받는 컴퓨터게임 등 각종 게임의 전국적 팬덤, 스포츠경기 광팬들, 스포츠선수들과 골퍼의 팬덤들, 개그맨·코미디언과 개그·코미디 애호인들, 마술사와 팬덤, 서커스의 각종 묘기꾼들과 관중, 바둑기사와 체스챔피언, 아마추어 바둑 팬들, 각종 엔터테이너들의 예능을 즐기는 관람자들, 오늘날 100세 시대에 매일 바둑을 두거나 테니스·골프·탁구를 치거나 화투 치기를 하며 놀거나 친구들과 각종 모임을 꾸려 노는 연금생활자들이 이 책을 읽고 자기들의 유희적 행위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유희적 행복과 삶의 의미를 더하기를 진심으로 바랄 따름이다.

송파 바람들이에서

2023년 5월

황태연 지識

놀이와 재미의 본질을 찾아서: 게임, 유희에 빠지는 현대인들을 위한 놀이학개론 결정판

 바야흐로 놀이, 게임이 세계를 휩쓰는 이때 놀이의 본질을 꿰뚫은 흥미로운 저작이 나왔다. 동서양 사상을 종횡무진 누비는 황태연 교수는 인간 근원적 유희 본능과 재미의 속성을 공자의 중화론으로 파고든다. ‘놀기 위해 일하는’ 세상의 모든 “노는 자들”의 원초적 갈망이 명쾌하게 정의된다.

‘놀이하는 인간’이란

 난장판놀이를 즐기는 아기부터 바둑 두는 할아버지까지. 사람들은 왜 놀이를 즐길까. 저자는 놀이가 “생명력과 심신능력의 자유로운 발휘, 표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놀이의 범주에는 나홀로 놀이와 같이하는 놀이가 모두 포함된다. 나아가 목적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호모 파베르(공작인)’가 아니라 놀기 위해 사는 ‘호모 루덴스’라고 규정한다. 이는 각종 게임에 열광하고 해외여행이 필수인 현대인들에게 딱 들어맞는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중화론: 놀이와 재미의 본질

 “놀기 위해 일하는” 호모 루덴스에게 재미는 곧 놀이의 궁극적 목표로서 매우 중요하다. 저자는 재미의 본질을 《중용》에 나오는 공자의 중화론中和論에서 찾는다. 질적인 균형〔中〕과 조화〔中節〕, 그리고 양적 중도中度가 재미를 좌우한다고 본다. 이 중화의 원리는 인간의 사회적 행위(유희, 공리, 예술, 도덕)를 규제한다. 유희적 행위를 판단하는 재미감각은 적절한 분량의 균형 잡힌 놀이에 재미를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과 《대학》, 《예기》 등 동서고전을 넘나들며 사례별 인간의 감정과 공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제3절에서는 아이들의 싸움놀이에서부터 유머, 만화, 게임, 도박에 이르기까지 놀이의 종류를 일목요연하게 다룬다.

유희를 보는 고금의 이론들

 그다음으로, 저자의 유희론과 현대과학 연구, 고금의 유희철학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놀이론을 확장, 심화한다. 자악 팽크셉과 템플 그랜딘은 어린 포유류의 날뛰기놀이는 각각 뇌 안의 유희충동, 놀이신경체계에 따른다고 본다. 이러한 뇌과학적·행태학적 분석은 저자가 ‘생명력의 분출’로 본 유희본능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유희철학으로는 유희의 가치를 예술, 노동보다 낮게 평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미메시스를 유희의 본질로 오인한 호이징거, 가다머 등 그 특징과 오류들을 낱낱이 파헤친다. 특히 ‘호모 루덴스’를 만든 호이징거 이론을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저자의 놀이론이 얼마나 정교한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유희는 노동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말한다. 대담하지만 일리 있는 말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오징어게임, BTS, 더 글로리 … 등 한국의 콘텐츠들이 세계 놀이문화를 좌우하고 있다. 그럼에도 놀이의 근원을 우리의 시각으로 보는 이론은 아직 거의 없다. 따라서 이 책은 K-한류의 이론적 지침서이자, 놀이가 일상이 된 MZ세대의 필독서이며, 놀이에 진심인 “노는 자들”을 위한 헌시라고 하겠다.

머리말 4

들어가기 10

제1절 중화의 철학 19

  1.1. ‘중화中和’란 무엇인가? 20

       ￭개관: 인간의 4대 행위와 기쁨·재미·미·선 21

       ￭중화와 재미의 관계 25

       ￭균형으로서의 ‘중中’의 개념 27

       ￭비례적 조화로서의 ‘화和’의 개념 37

       ￭중도中道와 중도中度로서의 ‘중’ 개념 47

 1.2. 존재론적 ‘중화’ 이념 56

       ￭공자의 존재론적·우주론적 중화 개념 56

       ￭플라톤의 우주론적 중도 개념 59

제2절 중화와 4대 교감적 평가감각 67

 2.1. 내감의 변별력과 공감과의 연계 68

      ￭중화에 대한 내감적 직관과 변별 68

      ￭공리적·유희적·예술적·도덕적 공감 70

 2.2. 단순쾌감과 교감쾌감 74

     ￭감각과 감정의 중화 74

     ￭공리적 정체성과 생존도덕 80

제3절 유​희적 중화로서의 재미와 게임의 이해 95

 3.1. 유희와 재미 96

   ￭유희는 생명력과 심신능력의 자유분방한 표출 97

    ￭재미는 유희의 중화성에 대한 느낌 102

    ￭어린이들의 유희행위로서 ‘난장판놀이’와 ‘날뛰기놀이’107

    ￭발전된 유희로서의 ‘흉내(미메시스)’와 ‘내기’ 108

    ￭언어적 유희로서의 유머·위트와 유희적 정체성 113

    ￭최고 형태의 유희로서 ‘게임’ 116

    ￭공리적 유희로서 ‘도박’ 120

3.2. 유희의 신경과학과 동물행태학 125

    ￭자악 팽크셉의 유희체계이론 125

    ￭템플 그랜딘의 동물·아동유희론 145

3.3. 유희와 재미의 이론들: 플라톤에서 가다머까지 154

    ￭플라톤의 놀이와 재미의 개념 154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리적 유희이론과 오류들 161

    ￭호이징거의 유희 개념과 이론적 모호성 166

    ￭로제 카이와의 유희 개념과 이론적 난점들 171

    ￭가다머의 재미없는 유희이론 178

3.4. 재미의 공감과 유희적 행복감 190

    ￭재미와 인생의 행복 190

    ￭유희의 보편적 활용: 유희, 세상을 지배하다 196

맺음말 206

참고문헌 209

저자약력 213

찾아보기 216

황태연黃台淵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외교학과에서 석사학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괴테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동서양 정치철학과 정치사상을 가르쳤다. 현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그는 45년 동안 동서고금의 정치철학을 폭넓게 탐구하면서 공자철학과 한국·중국근대사에 관한 광범하고 철저한 연구를 바탕으로 공자철학의 서천西遷을 통한 서구 계몽주의의 흥기와 서양 근대국가 및 근대화에 관한 연구에 헌신해 오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감정과 공감의 해석학(1-2)》(2015),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2017),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기원(1-2)》(2019), 《공자와 미국의 건국(1-2)》(2020), 《17-18세기 영국의 공자숭배와 모럴리스트들(상·하)》(2020), 《유교적 근대의 일반이론(상·하)》(2021), 《책의 나라 조선의 출판혁명(상·하)》(2023)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