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우리 산하를 다시 걷다] 3부. 울진 땅 거벌모라, 타임캡슐 기행
글번호 50
기사분류 경향신문생활문화
게재날자 2006.06.05
조회수 2118
1988년 1월20일 울진군 죽변면 봉평2리 118번지의 ‘봉평들(일명 새들)’에서 일어
난 일이다. 논 임자(주두원)가 포클레인 용역으로 객토를 하다가 길쭉한 직사각형 형
태의 바위 하나를 파낸다(204㎝ 길이에 최대 너비 70㎝). 성가신 암석 제거했다고 후
련하게만 여기고 그냥 개울가에 내버려 두었는데 마을 이장(권대선)이 ‘이상한 글씨
들이 쓰여 있는 돌이 나왔다’ 하고 울진군 공보실에 전화로 통고한다(3월21일). 여
러 확인 과정을 거쳐 4월15일 대구매일신보가 ‘신라 비석 발견’ 사실을 1면 톱으
로 세상에 알린다. 그리하여 이 해 11월4일 이 암석은 ‘울진 봉평 신라비’라는 공
식 명칭에 국보 242호로 지정을 받는다.


이 ‘국보’는 원래 발견된 위치에서 마을 서낭당 옆으로 옮긴 후 비각을 세워 안치
하고 있다. 4각형 변성화강암의 한 면에만 글씨가 새겨져 있고 다른 세 면에 인공의
흔적은 없다. 비문은 10행에 399자의 고졸한 해서체로 이루어져 있는데 30여 글자들
은 판독이 불가능하다.


읽어낼 수 있는 문자들을 통해 과연 무엇을 알아낸 것일까. 갑진년 정월 십오일/ 모
즉지(牟卽智)/ 매금왕(寐錦王)/ 거벌모라(居伐牟羅)/ 남미지(男彌只)/ 노인법(奴人
法)….


서기 524년(갑진년, 법흥왕 11) 정월 15일, 모즉지 매금왕(곧 법흥왕)과 서라벌 6부
대신 14명이 모여서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거벌모라와 남미촌이라는 곳에서 생긴 사
건에 대해 ‘노인법’을 적용시켜 과오를 범한 자들에 대해서는 곤장을 치는 형벌을
내리기로 한다. 이를 어떻게 실행하게 했는지 경위를 밝히는 콘텐츠로 짜인 것이 이
‘신라비’였다.


1988년의 시·공간으로부터 1,464년 전으로 거슬러올라 서기 524년 정월로 단박에 당
도케 하는 타임캡슐이다. 한국학계는 흥분과 긴장에 이어 탐구 작업에 몰입하게 되
고….


신라비 발견 1년이 갓 지난 시점에서 긴급하게 관련 연구 보고서가 작성된다. ‘울
진 봉평 신라비 특집호’라는 부제를 붙인 ‘한국고대사연구 2호’(지식산업사, 1989
년 5월20일)다. 나는 지금 이 책을 다시 읽고 있는 중이다.


긴급 비상연구에 들어간 고대사 연구자들은 비문 판독 검토와 회의와 토론을 벌여 마
치 1,500년 전 서라벌 6부회의와도 같은 상황을 반복한 것인데, 다음과 같은 이들이
다. 조유전 이명식 남풍현 임세권 최광식 주보돈 이문기 노태돈 이우태….


사회적 무관심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한국사 타임캡슐을 운전하는 학병(學兵)들의
노고가 있어 근대인문과학(한국사학)이 올라선다. 인문과학도와는 다른 문학도의 국
토인문학으로 무엇을 보탤 수 있을지 다시 찾은 울진 땅 옛 거벌모라의 신라 비석 앞
에서 자문해 본다.





울진 봉평 신라비의 탁본.

#동해 역사지리학, 민족대이동의 통로


우선 ‘신라비’의 현장 역사지리학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에 대해 언명해두고자 한
다. 이 비석이 세워지던 시대의 서라벌 중앙권력과 거벌모라 지방세력의 정치지리학
은 대단히 흥미로운 ‘국토 스토리’다. 더구나 동해안은 ‘동아시아 역사지리학’
의 주요 중심지대이고 활동공간이었다.


오늘의 동북아시아는 중국-러시아-남북한-일본의 ‘근대국민국가’ 단위로 구획되지
만, 4∼6세기의 상황은 크게 보아 대륙성 세력과 해양성 세력의 냉전 및 열전 구조이
다.


고구려의 대륙성은 광개토왕 시절에 ‘위-진 남북조’ 구도에 고구려를 대두시켜 3
원 정립(鼎立) 구조로 바꾸어 놓게 하지만, 해양성의 판도도 뒤틀어놓는다. 고구려-
신라의 연합세력 구축이기보다는 신라를 제후국으로 삼는 해양 방면 진출 의지 실현
이다. 고구려의 신라 구원군 5만명이 동해를 거쳐 남해안에 당도하여 가야-왜의 연
대 해양세력을 와해시킨다. 백제(아신왕)는 이미 ‘노객(奴客)’, 곧 고구려의 제후
국임을 자인하게 되고 아울러 ‘도래인’이라 하는 유민들이 대거 일본열도로 흘러들
어간다. 그러함에도 근대일본 군국주의 사관은 광개토왕 비문의 ‘신미년조(條)’를
어이없게 해석코자 하는 해프닝을 벌였으니 무모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다.


대제국 고구려의 대륙성과 해양성으로 ‘천손족(또는 동이족) 일통사회’를 펼쳐보였
던 것으로 살필 수 있다. 다만 제국-제후국의 관계로 엮는 느슨한 형태의 대제국이었
고 일통사회였다고 지적해볼 수는 있겠다. 이러한 동북아 일통구조가 장기간 유지되
지는 못하지만.


5세기 중후반 무렵부터는 고구려 대항 연합구도가 나타난다. 신라는 백제와 ‘결혼동
맹’까지 맺고 가야 나라들마저 가세시켜 고구려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이러
한 대단한 전환시대의 ‘비밀문서’ 공개가 곧 울진 신라비라 할 수 있다.


거벌모라 주민들의 항쟁사건에 대한 서라벌 중앙권력의 대응이 곧 ‘신라비’의 내용
이라면 이 지역에는 능동적인 토착세력이 존재했음을 알게 한다. 남옥저-동예-맥족
의 후예들은 고구려에 복속되고 다시 신라의 ‘노인법’으로 다스려지는 예속민의 처
지가 되었을지라도 지역적 근거지의 자치적인 역량을 확보코자 했던 것으로 살필 수
있다. 오늘의 울진 사람들이 이를 자랑으로 내세울 수도 있겠다.




#울진 신라비의 역사 사실성-역사 상상력



유리에 갖힌 고분도로공원 유리 덮개 속의 신라 고분. 2002년 6월 울진 원남
면 덕신리 도로 공사장에서 83기의 신라 고분군이 출토되었다. 고분들은 발굴된 곳
에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함에도 매화리의 도로변으로 옮겨 ‘고분 공원’을 조성해
서 유리 덮

KBS TV의 ‘역사스페셜’이 흥미로운 보도를 한 바 있기도 하다(2001년 7월28일 방
송). 거벌모라 항쟁 사건의 주역에 해당되는 인물이 일본으로 도래하였으리라는 가정
이다. ‘하타’라는 일본 씨족 조상의 원류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으리라 추정하는
하타 가문의 일본인이 울진 현지답사를 거듭하며 이를 확인코자 했다는 것이다. 더
욱 특별한 역사스페셜 히스토리로서 울진 신라비를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이번 기행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신라시대 울진 유물’을 대하게 된다. 동해
안 종단의 7번국도를 2차선 도로에서 4차선으로 확장하던 중 2002년 6월 울진 원남
면 덕신리 공사장에서 신라시대 석곽묘(돌덧널 무덤) 83기 및 부장품들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국토관리청은 안동대에 발굴 조사를 의뢰했다. 그 결과 5세기 중반에서 6
세기 초반의 신라 계통 유물로 확인됐다. 금동 제품들과 함께 고리 장식이 달린 큰
칼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볼 때 덕신리 일대는 규모 큰 신라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데 이런 유형의 고분 발굴은 울진에서 처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특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석곽묘들과 함께 금동류 17점, 철기류 46점 등
모두 924점에 이르는 부장품들은 발굴 현장에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고 전시관을 세
워 진열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함에도 이를 울진 원남면 매화리에 ‘고분
공원’을 조성하여 옮겨놓고 있다.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두꺼운 유리로 덮개를
씌워 83기 중에서 10기의 석곽묘와 부장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발굴 현장을 보존할
형편이 아니어서 다른 도로변에 ‘공원’을 조성한 것은 임시방편의 ‘궁여지책’이
겠지만, 이런 방식의 신라 유물 보존 보호는 궁색하고 나아가서 궁상스럽기조차 하다
는 것을 감추지는 못한다.


봉평 신라비와 덕신리 고분군을 함께 아우르는 역사지리학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듯
싶다. 동해의 고대아시아족 이동루트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조사와, 21세기의 유라시
아 대륙을 일통으로 연계하려는 ‘환동해권 개발’은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확인코
자 한다.

경향신문 6/4일개재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