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문 서 평 내 용 보 기

도서명 한국선비지성사
서평제목 18세기 토지공개념 정전론 겉은 개혁, 속은 복고
신문사 중앙SUNDAY
게재일자 2018/03/24
관련기사 링크 http://news.joins.com/article/22471176

실학별곡 - 신화의 종언 ② 실학과 토지공개념





21세기 첨단산업시대에 토지공개념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조선시대 정전론(井田論)을 연상케 한다. 비현실적 이상론만 거론해 현실적 대안은 봉쇄하는 구조가 반복됐다. 사진은 강남 일대 아파트 단지. [중앙포토]

21세기 첨단산업시대에 토지공개념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조선시대 정전론(井田論)을 연상케 한다. 비현실적 이상론만 거론해 현실적 대안은 봉쇄하는 구조가 반복됐다. 사진은 강남 일대 아파트 단지. [중앙포토]
.18세기 실학자들의 사회개혁안 가운데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이 토지 문제였다. 그들의 토지개혁안을 대개 ‘정전론(井田論)’ 혹은 ‘정전제’라고 부르는데, 18세기의 토지공개념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개헌안에 토지공개념이 포함돼 있다. 18세기와 21세기의 두 토지공개념은 같은가 다른가.



맹자서 유래한 이상론
균전론·한전론·여전론 다 비현실적
실현 가능한 현실적 대안만 봉쇄

토지국유제 기초한 발상
근대 지향 아닌 ‘봉건적 사회주의’
동시대 애덤 스미스는 ‘누진세’ 구상

20세기 실학 그릇된 해석
남북 모두 ‘반근대적 이상론’을 미화
21세기에도 토지공개념 다시 꺼내



‘실학의 시조’ 반계 유형원이 제시한 토지개혁안은 ‘균전론’(均田論· 혹은 公田制)이었다. ‘실학의 중시조’ 성호 이익은 ‘한전론(限田論)’을 주장했다.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은 ‘여전론(閭田論)’과 ‘정전론’을 제시했다.

18세기 실학은 자본주의의 맹아, 즉 자유시장과 산업화의 싹을 틔운 사상인 것으로 간주돼왔다. 실학자들의 토지개혁안이 과연 그런 모습이었을까.

마을 단위로 땅을 나눠주는 정약용의 여전론은 ‘협동농장’을 연상시킨다. 30호(집)를 1개의 단위로 묶어서 1여(閭)라고 부르고, 이 1여가 땅을 공동소유, 공동경작, 공동분배하는 방식이다. 여전론은 정약용이 38세 때 내놓은 주장인데, 그의 말년 저작이자 국가개혁서인 『경세유표』(1817년)에서는 주로 정전론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정전론은 정약용의 독창적 발명품이 아니다. 민본주의 철학자 맹자에서부터 유래하는 동아시아의 이상적 토지제도였다.(『맹자』 ‘등문공’ 상 3장)

맹자가 제기한 정전제는 당대보다도 후대에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의 『맹자집주』에 의해 부각되었다. 주자학을 기반으로 조선을 창건한 사대부들이 제시한 토지개혁안도 정전론이었다.(이영호, ‘유교의 민본사상과 조선의 정전제 수용’, 『퇴계학논총』, 2009.)

18세기 실학자들이 반(反)주자학적이었다는 통설은 정전제를 놓고 보면 틀린 얘기다. 주자학자들이나 실학자들이나 토지 문제가 거론될 때면 단골로 내세우는 주장이 정전제였다.(이정철, ‘정약용의 전제개혁론의 역사적 맥락’, 『한국사학보』 제47호, 2012.)


실학뿐 아니라 주자학서도 단골 메뉴

실학자들이 제시한 사회개혁안을 당시 기득권 세력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안타깝게 우리가 근대화에 늦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 또한 근거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국왕과 신하들이 경제 문제를 놓고 토론할 때마다 숱하게 등장하는 것이 정전제 또는 균전제다.

중국에서 북위(北魏)와 당나라 때 ‘변형된’ 정전제인 균전제가 시행되었으나 중국에서도 이후 실시된 적은 전무했다. 정전론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토지를 나눈 후, 가운데 네모의 ‘공전(公田)’을 주변의 8명 ‘사전(私田)’ 경작자들이 공동으로 경작해 국가에 세금으로 납부하는 형식이다. 정전론이 실시되지 못한 이유는 우물 정자 모양으로 모든 토지를 구획하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했지만 농지확장이 인구증가를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정전제는 토지국유제를 전제로 하기에 이미 토지사유가 관철된 상황에서라면 사유지를 국가가 수용하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전론의 정신을 살리면서 보다 현실적인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균전론과 한전론이었다. 우물 정자의 땅 모양에 상관없이 균등하게 토지를 나눠주려는 것이 균전론이고, 나눠준 토지의 매매를 제한하는 것이 한전론이었다.

세종·중종·영조 때 정전제나 한전제를 일부 지역에서 시범 실시해보았으나 실효성이 없어 폐기했다는 기록이 전한다.(『세종실록』 1419년 2월 20일, 『중종실록』, 1519년 7월 2일, 『영조실록』 1775년 1월 8일) 이같은 과정을 거쳐 정조는 한전론의 토지개혁을 포기하고 세금제도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기도 했다.(『정조실록』 1778년 6월 23일)

주자학자나 실학자나 왜 비현실적인 정전제 사고의 틀을 못 벗어난 것일까. 조선 후기에는 지주의 토지 독과점이 문제가 될 정도로 이미 토지 사유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만일 당시 실학이 자본주의 맹아 역할을 했다면 근대적 사유재산을 증식하는 정책이 제시됐을 것이다.


조선후기 토지 사유 확립돼 실현 못 해


18세기 실학자들이 살던 시대의 농사 풍속도. 단원 김홍도 그림 ‘밭갈이’. [중앙포토]


.또 당시 이미 일반화된 지주-소작 관계의 폐해를 자본주의적 농업경영 방식으로 바꿔내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을 터인데 그런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주자학이나 실학의 비현실적인 이상론이 발상의 전환을 봉쇄한 것은 아닐까. 실현 불가능한 이상론을 반복하면 오히려 실현 가능한 현실적 대안이 봉쇄되기 마련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와 동시대를 산 유럽의 계몽주의자인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1776)에서 ‘누진세’(progressive tax system)를 주장한 것과 대비해 볼 수 있다. 누진세는 더 많은 토지소유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리는 세제다. 토지소유에 적용된 누진세제는 최적의 세금을 내고자 하는 지주가 자신의 경제적 타산에 따라 토지소유의 상한을 스스로 정하게 함으로써 ‘한전제’의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실학자들에게서 잘 보이지 않는다. “실학자들의 토지국유제에 기초한 정전론은 원시공산주의를 복고하자는 주장으로, 이미 토지사유가 거의 확립된 조선에서는 실현 가망이 없는 반근대적·유토피아적 이상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49~53쪽)

토지제도를 통해 볼 때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서양식 근대’를 의식하고 산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 나름대로 자기 시대의 문제를 풀려고 했을 것이고, 이제 그런 그들의 역사는 ‘근대의 안경’을 벗겨내고 좀 더 자유롭고 다양하게 재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가 오늘 풀어야 할 관심사항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 ‘근대’라는 딱지를 붙인 20세기의 이데올로기다. 20세기에 규정된 실학 개념에는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다. 토지 문제 관련 복고적 사고를 못 벗어난 ‘봉건적 사회주의’ 실학에 ‘근대=개혁=진보=당위=가야 할 길’ 등의 가치를 부여하며 미화한 것이다.

20세기 실학 개념 형성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최익한(1897~?)이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유학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1927년 조선공산당(일명 ML파 공산당)에서 조직부장·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1936년부터 조선학운동에 편승해 정약용과 실학을 널리 알리는데, 65회의 장기 신문 연재를 한 ‘여유당전서를 독(讀)함’이 대표적이다.

해방 후 월북한 그가 1955년 펴낸 『실학파와 정다산』은 당시 남북한을 통틀어 최초의 연구서였다. 문제는 그 방향이었다. 마르크스 이념, 즉 ‘사회주의 프레임’으로 재단한 실학이자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의 정치사상은 ‘혁명적 민주사상’으로, 여전제는 토지국유에 의한 민주주의적 토지분배를 지향했다고 해석되었고, 『조선통사』에 북한의 공식 견해로 수록됐다.(최익한 지음, 송찬섭 해설·엮음, 『실학파와 정다산』, 서해문집, 2011)

1969년 이후 북한에서 실학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 한계’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수정됐다. 마르크스주의보다 김일성 주체사상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사회주의 영향으로부터 남한도 자유로울 수 없다. 북한처럼 노골적으로 ‘사회주의 프레임’을 우리 역사 해석에 적용하지는 않았지만, 남한에서도 은근히 실학자들의 토지개혁안을 ‘이상적 개혁사상’으로 묘사해놓곤 했다. 대부분의 역사서가 그렇다.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은 여전론, 정전론의 순서로 저술되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여전론은 정전론을 넘어서는 이상적 개혁사상이었으며, 그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것”(김용섭, ‘조선후기 토지개혁론의 추이’, 『동방학지』, 1989)과 유사한 시각이 반영돼 있다. 해방 이후 친일파 미청산과 잇단 군사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이 확산되면서 ‘봉건적 사회주의’ 조차 묵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18세기 실학과 21세기 더불어민주당의 토지공개념이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박정희·노태우 군사정부 때 제기됐던 토지공개념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진영논리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헌법의 기본권 보호 정신과 배치된다. 현행 헌법 23조 1항에서 사유재산권을 인정하고 있으며, 2항에서는 ‘재산권의 권리 행사는 공공복리에 맞도록 해야 한다’며 공공복리를 위한 보완책을 마련해놓았다. 그리고 헌법 37조 2항에는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 공공복리를 위하여 (법률로써)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특히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규정은 민주화운동의 성과로서 반영된 내용이다. 재산권뿐만 아니라 국민의 모든 기본권에 해당하는 것으로, 70년대에 긴급조치가 남용되었듯이 국가가 행정 편의를 위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도입된 것이다.


기본권 건드릴 ‘유사 국유제’ 의혹


그렇기 때문에 1990년대 초반에도 토지공개념 논란이 벌어졌을 때 결국 위헌 결정을 받은 바 있다. 이렇게 기본권을 건드릴 ‘유사(類似) 국유제’로 의심받는 토지공개념을 이번에 여당이 다시 들고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시대 주자학이나 실학에서 토지문제를 얘기할 때마다 비현실적인 정전론만 거론했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 아닐까. 현실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의지보다는 실현성 여부와 상관없이 이상론을 제시하며 ‘정치적 인기’를 관리하는 수단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상론이 실현이 안 되면 그것에 반대한 상대 탓만 하면 된다. 20세기 실학 개념 형성 과정에 활용된 ‘사회주의 프레임’은 고질병을 부채질하고 있다. 18세기 실학의 실제 내용과 무관하게 우리 사회에 형성돼 있는 ‘묻지마 지지’의 분위기가 만들어낸 ‘복고적 착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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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 전문가=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김영식 서울대 명예교수,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장득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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