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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설탕 근대의 혁명
서평제목 [직설] 간단하게 국수나?
신문사 경향신문
게재일자 2018/07/25
관련기사 링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7252054015&code=990100#csidx393e387d6a9c28297acf4a0143e4b83
[직설]간단하게 국수나?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날도 더운데 간단하게 국수나 말아먹자고 하면 그냥 한 대 쥐어박고 싶지.”




오래전 여름방학, 여주·이천 가운데께 자리한 공장에 기숙하며 창고지기 겸 지게꾼 노릇을 하던 때다. 밥을 대 먹던 집, 머리 새하얀 할머니는 내가 숟가락을 놓을 즈음 숭늉을 떠다 주며 살아온 이야기를 잠깐 하고 나서 빈 숭늉 사발을 들고 일어나시곤 했다. 꼭 들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던, 어색한 침묵을 재치 있게 요리한 농촌 여성 노인의 말 가운데 저 “간단하게 국수나”는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음식 공부를 하면 할수록 쟁쟁하다.

“주는 대로 먹기나 해, ‘지단은 안 부쳤어?’ 그러면 내 서방이라도 정말 한 대, 그냥!”

지난 일이라 웃으며 하는 말씀이었지만 ‘간단하게 국수나’는 음식 하는 수고를 전혀 모르는 사람 입에서 나올 만한, 음식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야속한 소리임에 틀림없다.

가게에서 마른 소면을 사다가, 봉지라면 삶듯 삶아, 온갖 건해산물을 섞어 포장한 맛국물 재료로 낸 국물에 국수를 말기는 최근의 일이다. 아니 액상 장국도 이미 병들이로 나온다. 이는 최근의 풍경이고, 이렇게 먹기 전까지 말던 국수 한 그릇은 음식을 둘러싼 물질문화의 고단한 행로를 잘 보여준다.

예컨대 소면의 유통에서도 도농격차가 있었다. 소면을 쉬이 구하지 못하면 반죽을 밀어 칼국수를 써는 수밖에 없다. 밀가루는 어땠을까. 기성품 소면이 귀한 곳이라면, 새하얀 포장 밀가루 또한 돌지 않는 곳이다. 그렇다면, 제분 또한 집에서, 사람이, 더구나 여성 인력의 가사의 하나로 수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은 정말 고단했다.



<설탕, 근대의 혁명>을 쓴 가천대 이은희 교수에 따르면, 밀에서 밀가루를 얻기까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밀가루를 흔히 구하기 어렵던 1970년대 말 이전 칼국수의 별명은 ‘여자들의 땀국’이었다. 당시의 밀가루는 거대한 공장의 첨단시설이 탈각과 제분, 선별, 포장을 일관해서 내놓는 흔한 상품일 수가 없었다. 밀농사를 짓고 나서, 더구나 쌀이 부족한 때 먹자고 밀가루를 내자면 이런 과정을 거쳐야 했다.

먼저 타작해 얻은 밀낟알을 일일이 까부르고 이를 물에 씻어 멍석에 펴 말린다. 그러고는 여성이 깨끗이 씻은 발로 마른 밀낟알을 꼭꼭 밟는다. 그래야 그다음 맷돌질이 쉬워진다. 6월 말에 거둔 밀로 굳이 밀가루를 내는 때는 언제인가. 쌀도 다 먹고, 그래도 밥이 되어 주던 좁쌀마저 다 먹은 한여름이다. 이때 밀가루라도 내야 칼국수나 수제비라도 해 먹고 여름을 날 수 있다. 밀낟알 밟기는 한여름에 해 있을 때, 해 받아가며 한다. 이는 나이가 어린 여성의 몫이었다. 석양이 되어서야 밟은 낟알을 거두면, 다시 그 집의 나이가 좀 든 여성, 주부가 밤새 맷돌로 타 밀가루를 받았다.

탈각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간신히 씻어 말린 밀낟알에서 받은 밀가루가 순백색일 수가 없다. 여기서 더 품질 좋은, 더 깨끗하고 하얀 밀가루를 받으려면? 옛 문헌에 따르면 거친 가루를 눈이 고운 깁에 치고 또 치는 수고를 해야 했다.

국수의 시작이란 전에는 소면 한 뭉치 사오기, 밀가루 한 포 사오기가 아니었다. 시작은 자가제분이었다. 그것도 동력 장치의 힘을 빌릴 수 없는, 하루종일 여성 노동으로 감당한 제분이 시작이었다. 그래서 조선 시대 조리서 속의 국수 항목을 보면 국수를 어떻게 맛나게 말아라, 반죽에 맛을 어떻게 들여라 하는 이야기 이전에, 흰 가루 얻기부터 설명한다. 그때 밀가루는 ‘진말(眞末)’이라고 따로 높여 일컬을 지경이었다. 진말의 시대에는 치고 또 친 밀가루로 반죽해, 칼질 거쳐, 국수가락까지 내면 일단 국수가 ‘됐다’고 여겼다. 가루도 없고, 반죽도 없고, 가락도 내기 전에, 맛타령을 할 틈은 별로 없었다. 그대로 장하고, 국수가락이 나온 것만으로도 우선 흐뭇했다.


아닌 게 아니라 한여름, “간단하게 국수나” 소리를 할 만한 때가 되긴 했다. 기성품 소면, 기성품 칼국수 사리도 흔하고, 맛국물, 장국이 온갖 포장과 병에 담겨 쌓여 있다. 그래서 쉬운가. 안 해본 사람은 모르는 속내가 따로 있다. 국수는 제 몸의 열 배 넘는 물을 잡아 100도 넘도록 펄펄 끓이는 수고를 거치는 음식이다. 그 옆으로 사리를 말 육수는 또 따로 끓여야 한다. 전기밥솥이라면 뿜지 않을 열기와 습기를 물 가득한 솥이 푹푹 뿜는 동안 그 열기와 습기를 받으며 하는 수고는 변함이 없다. 이 여름, 남 먹이자고 간단할 수 없는 일을 수행 중인 동포 여러분께 경의를 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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