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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서평제목 [서동윤의 역사 브리핑] 조선의 기억 돌아보기 - 정도전
신문사 위드인뉴스
게재일자 2018/12/19
관련기사 링크 http://www.withinnews.co.kr/news/view.html?section=1&category=5&item=&no=17399
[서동윤의 역사 브리핑] 조선의 기억 돌아보기 - 정도전
위드인뉴스 서동윤(한국삼육중 역사 교사)



기억의 나라 조선


조선은 기억의 나라였다. 치열하게 사건과 인물을 기록했고 기록으로 저장했다.『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이 모든 것을 치열하게 기억했던 것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기록물이다. 그런데 종종 ‘기록’이란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기록에 담긴 기억은 ‘사실’ 그대로를 설명하기보다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 아래 만들어지며, 때로는 권력이 변조를 시도하기도 했다. 기억이 기록으로 저장되는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욕망이 투영되었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의 ‘기억들’을 다시 짚어보려고 한다. 기록으로 남겨진 조선의 기억에 어떠한 욕망과 의도가 자리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자 이제 그 욕망의 기억들을 살펴보자.



첫 번째 이야기 :정도전은 어떻게 기억됐는가?



조선의 설계자이자 최초의 반역자 정도전, 그는 어떻게 기억됐는가?


혼란스러운 고려 말,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영웅이 등장했다. 바로 정도전이다. 성리학이라는 개혁 이념과 정치적 감각, 끈질긴 열정으로 무장한 정도전은 이성계라는 걸출한 신흥 무인과 손잡고 조선을 건국한다.

한편 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략과 구체적인 국가 건설 방안을 정도전에게 의존한 이성계는 절대적으로 정도전을 신뢰했다. 정도전도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이성계에게 왕위를 안기면서 자신은 ‘2인자’ 이자 ‘실세’로자리한다. 실제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강력한 신뢰를 바탕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아 나갔다. 『조선경국전』등을 저술하여 조선의 통치이념과 원칙을 세웠고, 왕국의 수도인 한양과 법궁인 경복궁 건설을 주도하기도 했다. 새로운 나라 조선의 설계를 사실상 정도전이 주도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건국의 영웅 정도전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자취를 감춘다. 1388년 8월 왕자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강력한 왕권을 꿈꾸는 왕자 이방원과의 대결에서 패배했다. 신하가 국정을 주도하는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던 제왕의 후계자가 건국 영웅을 제거한 것이다. 정도전은 왕권을 능멸한 반역자가 되어 그렇게 사라져갔다. 그렇다면 이후 조선에서는 그를 어떻게 기억했을까?



음험한 반역자 정도전


정도전은 조선의 첫 반역자였다. 훗날 국왕으로 즉위하는 이방원이 그를 제거했기 때문에, 정도전은 반역자여야 했다. 실제로 『태종실록』은 ‘음험(陰險)한 성격의 정도전’, ‘간사한 신하’, ‘권력을 가진 신하(權臣)’등의 표현을 사용했으며,『세종실록』도 사건을 ‘정도전의 반란’이라고 정확하게 기록했다. 또한 시간이 제법 흘러 임진왜란을 기록한『선조실록』도 ‘간신 정도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정도전을 간신의 반열에 올리고 있었다.『광해군일기』가 역모로 처형된 허균(1569~1618)을 비난하며 ‘정도전을 흠모했음’을 지적한 것처럼,정도전은 음험하고 간사한 반역자로 기억되고 있었다.



간신 정도전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조선후기에 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실제로『현종실록』과 『숙종실록』에 ‘간신 정도전’이라는 표현이 그대로 사용되며, 영조 대『승정원일기』에도 ‘정도전의 변(變), 화란(禍亂)’이라는 표현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더구나 당시는 숙종, 영조, 정조(1672~1800)로 이어지는 왕권강화의 시기였고, 국초의 간신 정도전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갔다.

학문에 관심이 많던 정조가 정도전의 문집을 다시 간행하라고 했다는 점이 이색적이지만, ‘간신’으로 대표되는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그대로였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1681~1763)이 『성호사설』에서 정도전을 ‘말만 잘하고, 행하지는 못했던 인물’로 평했던 것은, ‘간신’ 정도전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왕실의 몰락과 경복궁, 그리고 정도전의 부활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은 조선 말엽,정확히 말하면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왕실의 부흥을 꿈꾸던 시기에 부활했다. 조선 후기까지 간신이었던 정도전이 왜 이 시기에 부활했을까?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조선 왕실의 몰락과 관련이 깊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한 후, 60여 년 간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이어졌다. 그 시기 왕실의 권위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안동김씨를 필두로 한 외척세력이 권력을 잡고 국정을 좌우했다. 당시 세도 권력이 원칙에 따른 정치를 하지 않자 모든 제도와 원칙이 무너지고 조선은 혼란과 부조리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른바 ‘매관매직(賣官賣職)’과 ‘삼정(三政)의 문란은 서로가 시너지 효과를 내며 백성들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갔고 조선은 일부 권력을 가진 몇몇 가문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을 다시 한 번 되살리려 했던 인물이 바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었다. 왕실의 어른 신정왕후 조 대비의 지원을 받은 그는 나락으로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되살리려는 작업의 핵심으로 ‘경복궁 중건(重建)’을 택했다. 백성들과 양반지배층에게 권위를 되찾은 왕실의 위엄을 보여주기에 ‘경복궁을 다시 짓는 것’ 만한 ‘시각적 효과’를 주는 사업이 없었던 것이다. 경복궁 중건 사업은 고종 시대 핵심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고, 3년 만인 1868년 고종이 이어(移御)하면서 사실상 완료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복궁의 설계자 정도전은 부활했다. 원칙이 무너지고 위엄이 땅에 떨어진 조선이 다시 꺼낸 기억은 찬란했던 왕조의 첫 모습이었고, 그것은 경복궁 중건으로 일부 현실화 되었다. 그리고 반역자였던 정도전은 경복궁의 첫 설계자로서 화려하게 부활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의 복권(復權)작업은 빈틈없이 이루어졌다. 1865년 대왕대비의 명으로 ‘개국공신’의 칭호가 회복되었고, 1867년에는 고종이 직접 정도전을 칭찬했으며, 1870년에는 ‘문헌공(文憲公)’이라는 시호가 더해졌다. 나아가 정도전의 후손을 찾아 사당을 짓고 공식적인 제사도 허용되었다. 정도전을 둘러싼 기억은 이렇게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기억의 변화와 정도전


정도전은19세기 말엽 조선에서 그렇게 부활했다. 그는 400년 간 역적으로 살다가 극적으로 다시 영웅으로 기억되었다. 간신과 역적으로서의 모습은 망각되고, 법궁(法宮)의 설계자로서의 모습만 부각되었다. 극적인 변화였고, 정도전에 대한 기억이 필요해진 왕실에 의해서였다. 쇠락한 왕실이 과거의 영광에서 부활을 꿈꿀 때, 과거의 영광의 주역이었던 정도전이 반역자에서 다시 영웅이 된 셈이다.

2018년, 정부수립 70년의 대한민국. 언젠가 우리도 과거를 꿈꾸며 누군가를 영웅으로 다시 부활시킬까? 정도전의 부활을 보며 생각해볼 문제이다. 정도전, 당신은 그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이 기사는 한영우,『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지식산업사, 2014를 참고하고『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성호사설』의 기록을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서동윤 within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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