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문 서 평 내 용 보 기

도서명 설화작품의 현상론적 분석
서평제목 〈기획〉 낙동강을 노닐다 7
신문사 경상매일신문
게재일자 2021/06/02
관련기사 링크 http://www.ksmnews.co.kr/default/index_view_page.php?idx=337363&part_idx=229
<기획> 낙동강을 노닐다 7 - 현판, 그 속에 깃든 의미ㆍ옛 이야기를 찾아서 떠나다


고택의 상징 ‘현판’
침계루ㆍ대웅보전ㆍ천불전 원교 글씨
무량수각ㆍ동국선원은 추사의 글씨
단원 이홍도 작품 ‘이가당’ ‘담락재’
한석봉 ‘도산서원 현판’ 글씨 남겨
영호루 현판 ‘고려 공민왕’의 글씨
학의 신기가 담긴 애일당 현판 눈길


박동수 기자 / gsm333@hanmail.net입력 : 2021년 06월 02일

↑↑ 채화정


↑↑ 도산서원


↑↑ 애일당


↑↑ 영호루

[경상매일신문=박동수기자]현판이란 한마디로 건축물에 글씨를 새긴 나무판이다. 그 가운데 건물을 대표하는 명칭이 편액이다. 대게 건물 정면의 문과 처마 사이에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여행하면서 이것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몇 해 전 충남 예산의 추사 김정희의 고택과 그 집안의 사찰인 화암사를 둘러보면서도 가장 눈에 띈 것이 현판이었다. 한마디로 추사 집안의 고택은 현판으로 치장한 고건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주련과 편액 전시장이었다.

추사의 문자향은 남도 여행에서도 이어졌다.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과 동국선원 편액이 추사의 글씨인데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글씨도 추사와 불가분의 관련성을 맺고 있다.
현종6년(18940년)제주도로 귀양가던 추사가 초의선사를 만나러 대흥사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대웅전에 걸려 있던 원교의 대웅보전이라는 글씨가 너무 형편없다며 그 자리에 대신 자신의 글씨를 걸었다. 그리고 다시 8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자신의 글씨를 떼어내고 원교의 글씨를 걸었다. 혹독한 유배 생활을 통해 수양이 깊어진 추사의 마음에 드디어 원교의 동국진체의 수려함이 온전하게 느껴진 것이다. 현재 대흥사 현판 가운데 침계루, 대웅보전, 천불전은 원교의 글씨이고 무량수각과 동국선원은 추사의 글씨다.

안동지역에도 재미나는 현판 이야기가 많이 전해오고 있다. 흔히 단원 김홍도는 화가로만 알고 있지 그가 글씨에도 능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단원은 40세 때인 1784년에 안동에서 찰방을 지내면서 관찰사, 현감과 함께 청량산에 오르거나 지역 문사들과 더불어 시와 풍류를 즐기곤 했다. 단원이 이 당시 고성 이씨 임청각 주인(이의수(李宜秀·1745~1814)에게 그려준 화첩 속의 그림 ‘갈대꽃과 게’와 풍속화 ‘서당’(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유명하다. 임청각이란 당호가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 구절에서 따온 만큼 무릉도원의 화사한 ‘복사꽃’으로 화첩이 시작된다. 이어 ‘죽순과 오죽’ ‘소나무와 거제수나무’ ‘참외와 오이’ ‘내버들과 매미’ ‘황쏘가리와 치어들’ ‘석류’ ‘감나무와 팔가조’ ‘물잔디와 붉은가슴흰죽지’ ‘갈대꽃과 게’ 등 10점으로 꾸며져 ‘수금(水禽)·초목(草木)·충어(蟲魚) 화첩’이라 할 만하다. 마지막 폭 ‘갈대꽃과 게’ 그림에는 “1784년 6월에 임청각 주인을 위해 그렸다”(甲辰流夏 檀園爲臨淸閣主人寫)는 김홍도의 낙관이 보인다. 사실 이의수의 부친 허주 이종악(임청각 15대 종손)은 전서에 빼어난 서예가인 데다 산수화첩을 남길 만큼 화가로도 유명했기에 단원과 닮은 점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단원은 임청각 옆 정자에도 ‘이가당(二可堂)’이라는 현판 글씨를 남겼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신도청 방면으로 가는 길목인 풍산읍에 위치한 체화정의 담락재라는 글씨도 단원의 작품이다.

사액 서원인 도산서원의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다. 어느 날 선조는 현판을 하사하겠다며 한석봉에게 자신이 불러준 글자를 쓰라고 명했다. 먼저 선조가 원자를 부르자 석봉이 그것을 받아서 썼다. 이어서 서자를 부르고 뒤이어서 산자를 불렀다. 한석봉은 임금을 불러준 글자를 혼신의 힘을 다해 써 내려갔다. 석봉이 자신이 불러준 세 글자를 마무리하자 선조는 마지막으로 도자를 불렀다. 그제 서야 석봉은 자신이 퇴계 선생의 강학지소인 도산서원의 현판 글씨를 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붓을 떨어뜨려 마지막 글자인 도자를 약간 삐뚤게 쓰고 말았다. 이 때문에 도산서원 네 글자 현판 글씨 가운데 도자가 약간 비뚤다는 것이다.

영남 4대 누의 하나인 영호루의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다. 여러 차례의 홍수로 현판이 유실되었는데도 다시 찾는 기적이 반복된 곳이다. 공민왕은 1361년(공민왕 10) 10월에 10만의 홍건적이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수도 개경을 함락하자 그해 12월 한 달여 만의 피란 끝에 겨우 안동에 도착했다. 이후 영호루에 올라 홍건적을 토벌할 총병관으로 정세운을 임명하고 총반격을 시도한 끝에 홍건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홍건적이 물러나고 개경으로 환도한 후에도 안동을 잊지 못하여 1366년(공민왕 15) 겨울 친히 붓을 들어 ‘영호루(映湖樓)’ 석 자를 써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권사복(權思復)을 불러들여 면전에서 주었다. 1367년 안동 판관 신자전(申子展)이 영호루의 규모가 작아 공민왕이 내린 현판을 걸기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영호루의 위치를 더욱 물에 가깝게 하고 규모를 크게 확장하여 중수하였다. 1488년(성종 19) 김질(金?)이 중수하고, 1547년(명종 2) 홍수로 유실되자 5년 후인 1552년(명종 7) 부사 안한준(安漢俊)이 복원하였다. 1605년(선조 38) 두 번째 유실이 있었고, 71년 후인 1676년(숙종 2) 부사 맹주서(孟?瑞)가 복원하였다. 1775년(영조 51) 세 번째 유실이 있었고, 13년 후인 1788년(정조 12) 부사 신익빈(申益彬)이 복원하였다. 그러나 1792년(정조 16) 또다시 유실되어 4년 후인 1796년(정조 20) 부사 이집두(李集斗)가 복원하였다. 1820년(순조 20) 부사 김학순(金學淳)은 영호루를 중수하고, 자신이 쓴 ‘낙동상류 영남명루(洛東上流嶺南名樓)’라는 현판을 걸기도 하였다. 1934년(갑술년) 7월 안동시 내가 물에 잠기는 대홍수로 또 한 번의 유실이 있었고, 1970년에는 안동 지역민들이 모금한 성금과 국비, 시비를 모아 옛 영호루 자리에서 강 건너편인 현재 위치에 철근 콘크리트로 한식 누각을 새로 지었다. 공민왕 현판은 홍수로 영호루가 유실될 때마다 한두 해 또는 십여 년 뒤에 가까이는 안동시 풍산에서 멀리는 경상남도 김해에서 그때마다 수습되는 이적을 보여주었다. 현재 현판 또한 1934년 홍수 때 유실되었다가 그해 가을 경상북도 구미 부근의 강물에서 서기가 비춰진 걸 회수한 것이다. 영호루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김방경(金方慶)이 1274년(원종 15)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영호루에서 지은 시가 시판으로 걸려 있는 것으로 1274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쪽 면에는 공민왕의 친필 현판을 걸고, 남쪽 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인 ‘영호루’를 걸었다. 내부에는 갑술년 홍수 때 유실되었다가 회수한 현액들과 새로 복원한 현액들을 게판하였다. 현재 게판되어 있는 시판은 12점이고, 제영 1점과 현판 2점이 있다.

조선 중종(中宗, 1488~1544)시절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어부사(漁夫詞)」·「춘면곡(春眠曲)」·「효빈가(效嚬歌)」를 지어 영남가단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농암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애일당 현판 구전은 글씨 이야기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농암선생이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 애일당을 짓고 현판을 걸기 위하여 중국에 있는 명필가에게 글씨를 받으려고 제자를 보냈다. 고생 고생하여 반년 만에 중국에 도착한 제자는 명필가를 찾아 또 한 달이 넘도록 헤매고 다녔다. 한참을 다니다가 드디어 깊은 산중에 있는 명필가를 발견한 제자는 조선국의 농암선생 이야기를 하면서 애일당 현판 글씨를 청하였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사람의 글씨를 받으려고 그 머나먼 길을 왔으니 내 대번에 글씨를 써 주도록 하지.” 명필가는 이렇게 말하면서 산에서 꺾어 온 칡 줄기에 먹을 듬뿍 찍더니 단숨에 ‘애일당’ 석 자를 써 주었다. 좋은 붓에 근사한 먹을 갈아서 정성스레 써 줄 것을 기대하였던 제자는 명필가의 글씨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건 명필이 아니라 장난으로 휘갈긴 글씨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자는 다시 써 줄 수 없느냐고 재차 청하였다. 그러자 명필가는 “왜, 이 글씨가 마음에 안 드시오?” 하더니 글씨를 쓴 종이를 두어 번 흔들었다. 그러자 글자가 마구 꿈틀거리더니 세 마리의 새하얀 학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제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 써 줄 것을 간청하였다. 제자가 며칠 동안 간절히 청하였지만 명필가는 끝내 글씨를 써 주지 않았다. 그러더니 마지막에 가서 하는 말이 “이 아래에 내려가면 나보다 더 낫게 쓰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자는 할 수 없이 명필가가 말한 대로 산 아래에 있는 또 다른 명필가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그 명필가가 하는 말이 “산중에 계신 분이 우리 스승님인데 그곳을 찾아가 보시오” 하였다.
제자가 산 위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이야기하니 그 명필가는 “중국에서도 남에게 글씨를 주지 않는 분이신데. 특별히 조선국에서 왔다 하여 써 준 것 같은데……”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내 글씨는 스승 글씨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오. 학 세 마리는 못 되어도 한 마리 정도는 될 것이오” 하며 붓을 들어 정중히 글씨를 써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글씨를 받아 가지고 돌아온 제자는 농암선생 볼 낯이 없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다가 농암선생이 세상을 뜬 후에 사실을 밝혔다. 그러던 어느 해 큰 홍수가 나서 애일당이 쓸려 갔는데, 현판도 같이 떠내려가서 영영 잃어버렸다며 포기하고 있었다. 얼마 후 한 어부가 고기를 잡으려고 강에 나갔는데, 무언가 금빛 찬란한 것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건져 보니 그게 바로 애일당 현판이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처음 수록된 것은 1981년 일조각에서 출간한 『한국구비전설의 연구』에서다. 이후 1983년 한국연구원에서 출간한 『한국설화의 유형적 연구』와 1984년 안동군에서 출간한 『내고향 전통가꾸기』, 그리고 1991년 지식산업사에서 출간한 『설화작품의 현장론적 분석』과 1999년 안동시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안동시사』 2020년 민속에서 출판한 안동의 유교현판에 재수록되어 있다.
글 = 최성달 작가ㆍ사진 = 강병두 작가





박동수 기자 / gsm333@hanmail.net입력 : 2021년 06월 02일
[ 신문서평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