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문 서 평 내 용 보 기

도서명 한국사회과학의 탈식민성 담론 어디까지 와 있는가
서평제목 김정근 부산대 명예교수 “그에게 건국이란 시점이 아닌 ‘과정’의 문제였다”
신문사 교수신문
게재일자 2021/07/19
관련기사 링크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72343
김정근 부산대 명예교수 “그에게 건국이란 시점이 아닌 ‘과정’의 문제였다”
최익현 편집기획위원 승인 2021.07.19 08:52 댓글 0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인터뷰_ 범부(凡父)의 사상과 씨름해온 김정근 부산대 명예교수
김범부 사상의 핵심은 풍류정신과 동학
김범부의 건국은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주체적인 발전과 관련을 가진다.
1945년 해방을 맞이했을 때 김범부는 49세였다.
그 이전이 준비기였다면 그 이후는 김범부 사상 활동의 실천기였다.



해방 전과 후의 우리나라 사정이란 것이 김범부 건국사상이 배태한 밭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를 어떻게 새롭게 세울 것인가, 국민을 어떻게 새롭게 만들 것인가,
이런 것이 김범부의 고민거리였다고 생각한다.






민의원(오늘날 국회의원) 시절의 김범부. 오른쪽 한복 입은 이가 범부다.
2000년 6월 『한국사회과학의 탈식민성 담론 어디까지 와 있는가』(지식산업사)를 출간해 화제가 됐던 김정근 부산대 명예교수(문헌정보학). 서구의존적인 한국의 사회과학을 통렬하게 반성하고 성찰해왔던 그는 80세를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지적 모색을 계속하고 있는 ‘현역 학자’다. 그의 탐색이 의외의 곳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랑외사』의 저자이자 풍류정신의 사상가였던 범부 김정설(凡父 金鼎卨, 1897~1966)이 그의 외조부다. 소설가 김동리가 범부의 아우다. 대한민국헌정회 제2대 국회의원(동래군, 1950.5.31~1954.5.30.)을 지내기도 했으며, 1956년에는 동국대 교수로도 강단에 선 바 있다. 근대적 교육의 세례를 제대로 받은 바 없지만, 세인들은 그를 가리켜 동양철학자, 한학자, 저술가로 부르고 추앙했다. 유불선에 두루 능했으며 특히 동학에 조예가 깊었다. 민족재생의 동력을 찾기 위해 남들이 서양을 좇을 때,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에서 근거를 구하려고 노력했다. 풍류정신을 규명하고 그것을 해석의 틀로 삼아 신생 대한민국의 국민윤리를 세우고자 했던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그가 박정희 군정에 제안했던 범국가적인 국민운동도 같은 맥락에 놓인다.

2005년 부산대에서 퇴직한 이후 김정근 교수는 좀더 본격적으로 이 기이한 사상가의 삶과 생각, 그리고 사상의 흔적을 추적하는 일에 매달렸다. 본업이 사회과학자였던 터라, 사상과 철학의 족적을 남긴 범부를 좇는 일은 여간 녹록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여러 가지 결실을 거뒀는데, 무엇보다 눈여겨볼 대목은 2009년 창립된 ‘범부연구회’와 범부연구총서 간행이다. 김정근 교수는 이 두 가지 일에도 깊이 관련돼 있다. 또한 공식적인 학회 활동과 함께 그는 김범부 연구 3부작 간행에도 집중했다. 『김범부의 삶을 찾아서』(선인, 2010), 『김범부의 생각을 찾아서』(한울, 2013), 그리고 『김범부의 건국사상을 찾아서』(산지니, 2014)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 3부작에 추가한 게 지난해 8월 내놓은 『한 건국사상가의 초상』(선인)이다. 책의 부제는 ‘김범부(金凡夫, 1897~1966)를 찾아서’다.

그렇다면, 범부가 일찍이 깊이 천착했던 풍류정신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풍류정신은 김범부 사상의 핵심 주제”라고 말하는 김정근 교수에 따르면, 김범부는 ‘신라의 얼굴을 한 것이 풍류사상이고 조선의 얼굴을 한 것이 동학’이라고 보았다. 풍류사상과 동학은 근원이 같다는 뜻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 두 사상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표출된다는 것이다. 그의 천수가 좀더 연장됐다면, 이 다이나믹한 사상이 시대와 만나 어떻게 스펙트럼을 달리하게 되는지를 천착했을 것이 분명하다.

사상가로서의 범부를 전면에 내세울 때, 그가 일제 식민지 시기에 사유의 토대를 쌓아 올렸고, 그 중심축에 ‘독립’을 뒀다는 사실, 그리고 해방 이후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사상의 고투를 이어갔다는 것, 5·16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의 군정 초기 사상적 교유가 있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김정근 교수의 3부작과 『한 건국사상가의 초상』은 일관되게 이러한 근대사의 맥락 안에서 범부 사상을 조명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교직에서 물러난 이후 노년의 삶을 관조할 시기에도 맹렬하게 사상가의 흔적을 좇아 퍼즐을 완성해가는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지성사적 작업이 단순히 개인사에 그치지 않는, 근대사의 한 중심축인 ‘나라 만들기’의 과제와 연결되는 범부의 건국사상과도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범부 사상을 추적한 김정근 부산대 명예교수.
△범부 김정설 선생이 외조부다. 그러니까 2010~2014년에 걸친 3부작 작업과 지난해 상재한 『한 건국사상가의 초상』이란 책들은 한국사회의 독특한 ‘가학(家學)’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왜 범부 사상을 찾아 나섰는지 궁금하다. 무엇을 찾고자 했는가.
“처음은 끌려 들어간 것이다. 나 자신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다. 동리목월문학관의 장윤익 관장과 범부연구회의 최재목 회장의 권유에 이끌려 마지못해 발을 들여놓았다. 스스로 약간의 힘이 생기고 의무감 같은 게 돋아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연구에 재미를 붙이고 주제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역시 한참 후의 일이다. 책을 4권이나 내놓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처음에는 체험 중심으로 글을 썼다. 자라면서 외손의 눈에 비친 가족의 풍경, <한국일보>, <경향신문>, 문교부, 흥사단 같은 데를 뛰어다니며 원고를 전달하던 일, 경주와 서울에서 산책길에 앞장서 걸으면서 듣게 된 이야기, 뭐 이런 경험을 통해 쌓인 밑천 같은 것을 활용했다. 그러니 한동안 나의 글은 생애사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참고로 말하면 나의 어머니 옥영(玉英, 1916~2007)은 김범부의 장녀다. 김범부가 세상을 떠난 것이 1966년이었는데, 그때 나는 29세였고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이전에는 외가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방과 후에는 이런저런 심부름을 했다.”

△범부 김정설은 어떻게 그 방대한 지적 체계를 형성했나? 그에게 영향을 준 이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김범부는 가방끈이 짧은 사람이다. 학력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 많은 지식과 통찰력은 주로 독서와 세상을 직접 읽는 데서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독서와 관련해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가 국회의원을 할 때 김동주 씨(후에 한의학박사, 민한한의원 원장)가 수행비서를 지냈다. 김동주 비서가 자료를 구해 나르고 김범부가 엄청난 양을 매우 빠른 속도로 독파하던 이야기는 유명하다. 나 자신이 사직공원 일대를 산책하면서 겪은 일이다. 내가 운동화를 신고 앞장을 서면 김범부는 뒤를 따르면서 말씀을 하곤 하셨다. 지금도 “세상을 직접 읽어야 한다”, “최복술(최제우의 아이 때 이름)이 잘난 사람이다”와 같은 말씀이 기억에 남아 있다.

김범부는 서울에서도 공부하고 백산 안희재가 설립한 민족기업인 백산상회의 초기 장학생으로 일본유학도 했다. 일본의 여러 유명 대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그 내용이 궁금해 나 자신도 논문 한 편을 발전시킨 적이 있고 영남대 최재목 교수팀도 글을 내놓은 것이 있다. 나 자신의 결과는 김범부는 ‘청강’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며 그 이유는 교실에서의 ‘순치(馴致)’를 거부하는 체질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최재목 교수팀이 일본 현지 방문을 통해 밝힌 논문의 요지는 김범부의 걸음은 학적이 있는 유학(留學)이 아니라 학적과 무관한 유학(遊學)이었다는 것이다. 김범부가 일본에 머문 것이 6년 정도였는데, 그 기간에 여러 캠퍼스를 돌며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가끔 강의실에도 들어가 보고 담당 교수의 허락이 있으면 대강도 하면서 세월을 보냈던 것 같다.

김범부는 어려서 서당에 다녔다. 그의 연보를 보면 4세부터 10년간 같은 스승 밑에서 글공부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기간에 그는 쉬운 것부터 사서삼경까지 모두 떼었다. 영남대 철학과의 이완재 교수는 “다른 어린이가 말을 배울 때 김범부는 글을 읽기 시작했고 한쪽이 『통감(通鑑)』 정도에 손을 댈 때, 이쪽은 칠서(七書)까지 읽어버린 것을 보면 과연 천재였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김범부에게 있어 이 10년 간의 서당 공부는 말하자면 규칙성이 있는 공부의 처음이자 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정해진 스승이 있었고 교과에는 단계 같은 것이 주어졌으며 출석도 꼬박꼬박 해야 했다.

김범부를 10년 동안 맡아서 가르친 스승은 김계사(金桂史, 1832~1910)였다. 김계사는 당대 경주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고명한 선비였다. 그는 경주 서편에 위치한 서악서원에서 공부한 선비였는데, 동시대의 학인 가운데 최경상(崔慶翔)이 있었다. 이 사람은 훗날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으로서 동학의 2대 지도자가 된 사람이었다. 김범부가 스승으로부터 동학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말을 보태자면, 김범부는 자신의 조부로부터 이미 동학 이야기를 들어오던 터였다. 조부 김동범(金東範)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현곡면(見谷面)에 살던 최복술(崔福述)과 친구 사이였다. 서로 통하는 데가 있어 자주 만나 놀기도 하고 활쏘기도 함께 했다. 서로 흉허물없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이였고 나이도 비슷했으므로 존대를 사용하지 않고 너니 나니 하고 불렀다. 이 최복술이 후일의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였다. 나중에 그는 국기를 문란케 한 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숙한 김범부는 이런 관련으로 어릴 때부터 사상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 같다. 조부 김동범과 스승 김계사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나중에 그는 같은 정신이 신라 때는 풍류정신으로 나타났고 조선조에서는 동학의 얼굴로 드러났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풍류정신과 동학, 이런 것이 김범부 사상의 핵심 주제다.”

△그렇다고 사회과학자로서 범부 사상을 찾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을 듯하다.
“위에서도 밝혔지만, 김범부 연구는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김범부와 혈연으로 관련이 있는 것을 알고 같이 하면 어떻겠는가 하고 권유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의 인도를 따르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 영남대의 최재목 교수, 경주의 장윤익 관장, 이런 분들이 먼저 시작했고 나는 이들의 전화를 받고 그때서야 겨우 해볼까 하고 나섰던 것이다. 나는 문헌학, 주제별 서지학, 이런 것을 전공으로 삼으며 논문도 쓰고 학생들도 가르쳤다. 그러니 김범부 연구는 처음부터 익숙한 주제는 아니었다. 내가 틈을 본 것이 개인적으로 관련이 있는 생애사 영역이었다. 이 영역이라면 아주 못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범부를 개인적으로 회상하는 글도 만들고 가계를 밝히는 글도 생산하게 됐다. 그것의 연장으로 ‘청강’에 대한 해석, 동학과의 관련, 박정희와의 관계 등에도 손을 댔다. 주변의 인간관계 덕택으로 거의 모든 글이 학인들의 모임에서 먼저 발표되고 나중에 책으로 수렴되는 과정을 밟았다.

김범부 사상의 핵심 주제는 풍류정신이다. 내가 주변을 돌기만 하다가 이것을 깨닫고 내 나름으로 본령에 약간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후였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내용을 조금 소개하면 이런 것이다. 김범부의 풍류정신은 다양한 접근이 가능했다. 내가 관심을 두었던 영역은 국민도덕과 관련이 있었다. 나 자신의 연구에 국한해서 말하면, 우선 김범부는 우리나라에서 국민도덕의 확립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김범부는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이것저것 좋은 아이디어를 엮어서 제시하는 방법은 허사라는 것이다. 외국에서 좋은 것을 수입해 사용하는 방법도 현실에서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방법을 ‘안출(案出)’이라고 하여 타당성이 적은 것으로 보았다. 이에 비해 ‘천명(闡明)’이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경험한 것으로서 ‘생리화’되어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라고 했다. 국민도덕의 성립을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생활 가운데서 고갱이 같은 것을 가려내어 천명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국민 대중이 받아들인다는 생각이었다.

김범부는 풍류정신과 화랑의 행태를 천명하는 데서 국민도덕 확립의 길을 열려고 했다. 그의 「국민윤리특강」 『화랑외사』와 같은 강의와 책이 나온 것은 모두 같은 관련에서였다. 김범부 사상은 어렵기도 하고 나에게 익숙한 주제도 아니었다. 지금도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정도에 이른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아쉽게도 1966년 범부 타계 이후 그의 사상적 면모, 그리고 나라 만들기와 관련된 아이디어들은 오랫동안 학문적 조명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이유가 뭘까?
“한국철학회장을 역임한 영남대 철학과의 이종후 교수는 김범부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다. 6·25 전쟁 때 스승과 제자가 부산 대신동 집에서 같이 기거한 적도 있었다. 그들은 2층 방에서 종일 대화를 나눴다. 아마도 철학적인 담소였을 것이다. 그런 관련으로 사람들은 두 사람을 부자 관계로 보기도 했다. 김범부 사후에 대구의 이종후 교수는 서울에 올라와서 김범부의 자식인 두홍(斗弘)을 만나 의논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한 번은 그들의 모임에 나도 끼어 있었다. 사직공원 앞에 위치한 집에서였다. 의논의 내용은 당시 두홍이 자신의 수유동 집 다락에 보관하고 있던 김범부의 메모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김범부는 생전에 메모하는 습관이 있어 그것을 모아놓은 것이 양이 많다는 것이었다. 하도 많아서 몇 가마니가 된다는 것이었다. 메모지에 쓴 것, 신문 가장자리에 무엇인가를 휘갈겨둔 것, 미완성 원고 등 가치 있는 내용이 많다는 대화가 오고 갔다. 그 자리에서 이종후 교수가 문득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가마니를 헐어 내용을 편집하여 루소의 『팡세』 식으로 책으로 펴내면 어떠하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에 대해 좋은 아이디어라는 동감은 있었으나 어떤 결론이 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에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두홍의 수유동 집에 불이 났던 것이다. 불이 심해 집이 내려앉고 말았다. 다락에 보관 중이던 김범부의 메모 가마니는 그 통에 새까만 재로 변했다. 이종후 교수와 두홍의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 화재 사건으로 인한 이종후 교수와 두홍의 좌절이 김범부 사후의 연구에 지장을 가져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김범부가 세상을 떠난 것이 1966년이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약 반세기 동안은 산업화와 민주화로 열기가 뜨거웠다. 김범부의 풍류정신, 건국사상, 이런 것을 들먹이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이것이 연구 지연의 주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2009년 이래 영남대 학인들을 중심으로 전국의 연구자들이 포진한 범부연구회의 활동이 새로운 계기를 만들었다. 대규모 세미나를 세 번이나 개최했다. 그때마다 논문집이 나왔다. 동리목월문학관의 김범부 심포지엄도 성황이었다. 김범부 사상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심포지엄이 3회 연속으로 열렸는데 매번 다수의 논문이 발표됐고 논문집도 나왔다. 늦게나마 다행스러운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발표한 김범부 관련 논문도 대부분 이런 공간을 이용한 것이었다.”

김정근 교수의 김범부 연구 3부작(『김범부의 삶을 찾아서』(선인, 2010), 『김범부의 생각을 찾아서』(한울, 2013), 그리고 『김범부의 건국사상을 찾아서』(산지니, 2014))과 지난해 8월 내놓은 『한 건국사상가의 초상』(선인)은 일관되게 근대사의 맥락 안에서 범부 사상을 조명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김정근 교수의 김범부 연구 3부작(『김범부의 삶을 찾아서』(선인, 2010), 『김범부의 생각을 찾아서』(한울, 2013), 그리고 『김범부의 건국사상을 찾아서』(산지니, 2014))과 지난해 8월 내놓은 『한 건국사상가의 초상』(선인)은 일관되게 근대사의 맥락 안에서 범부 사상을 조명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선생님께서는 3부작과 2020년 책에서 일관되게 ‘건국사상’이란 용어를 사용하셨다. 수년 전 신보수주의 학자들도 ‘건국’을 강조했는데, 범부의 건국사상은 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힌다. 『한 건국사상가의 초상』에서 “범부에게 건국이란 식민지 치하에서 원치 않은 방향으로 강제된 국가의 운영 프로그램을 해지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발전시키는 일에 이르기까지의 일체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었다”라고 쓰셨다. 개념을 정확히 하기 위해, 다시 여쭙겠다. 범부의 건국사상이란 어떤 것인가?
“1960년대에 쓰인 김범부의 어떤 글을 보면 그때까지 건국이 미처 완성되지 않고 진행 중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것으로 미루어보면 김범부는 건국을 ‘시점’의 문제로 본 것이 아니고 ‘과정’으로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김범부의 건국은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주체적인 발전과 관련을 가진다. 1945년 해방을 맞이했을 때 김범부는 49세였다. 그 이전이 준비기였다면 그 이후는 김범부 사상 활동의 실천기였다. 해방 전과 후의 우리나라 사정이란 것이 김범부 건국사상이 배태한 밭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를 어떻게 새롭게 세울 것인가, 국민을 어떻게 새롭게 만들 것인가, 이런 것이 김범부의 고민거리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김범부의 건국사상은 신생국인 나라를 정통의 기초 위에 올려놓기 위한 작업으로서 풍류정신-동학의 연결선에서 전개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뉴라이트와는 관련이 없다.”

△책 이야기를 좀 하겠다. 『한 건국사상가의 초상』 2장이 매우 흥미롭다. 제목은 ‘내가 보는 범부와 박정희의 사승(師承) 관계’다. 범부 타계 이후에도 13년간 박정희가 미망인에게 20만원을 담은 봉투를 보냈다는 개인사도 밝혔지만, “범부는 박정희가 혁명을 일으키기 수십 년 전부터 신념을 가지고 준비해오던 것을 가감 없이 그대로 개진”했다고 기술한 대목이 더욱 흥미롭다. 선생님은 화랑정신, 국민운동, 국민윤리, 새마을운동 등의 아이디어를 범부가 제공했다고 쓰셨다. 범부는 박정희 정권에 어떤 아이디어를, 언제까지 제안했나? 두 사람은 어떤 관계였나?
“김범부는 한때 스스로 정치에 몸을 담은 적이 있었다. 유서 깊은 동래군의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기 때문에 여야의 정계에 친구들이 많았다. 그리고 정치 자체는 몸이 떠난 이후에도 관심사로 남아 있었다. 5·16이 일어났을 때 정치하는 친구들은 처음은 정화법에 묶여 있었고 나중에 풀린 뒤에는 저마다 정당의 지도자가 되기도 하고 구성원이 되기도 하여 바쁘게 움직였다. 친구들 가운데 군인들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무시하고 적대감을 품은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김범부 자신은 달랐다. 처음부터 군정을 지지했다. 아마 공약을 보고 안심을 했던 것 같다. 국제 관계와 내치 면에서 호감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혼란을 막아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자유당과 민주당 인사들의 부패와 무능을 잘 알고 있기도 했다. 내 기억에도 ‘모리배들이다’ ‘정상배들이다’, 그렇게 표현하면서 정치하는 친구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5·16 직후에 박정희 장군의 방문이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박정희는 부관을 대동하고 군복을 입은 채 김범부의 서재를 찾았다. 서재에서 두 사람은 오래 대화를 나눴다. 그때 화랑정신, 국민운동, 국민윤리, 새마을운동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대화의 내용에 대한 증언을 수행비서 김동주가 남기고 있다. 5·16 초기에 김범부는 여러 면으로 군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강의도 해주고 글도 써주었다. 오월동지회가 결성될 때는 부회장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 조직의 회장은 박정희였다. 김범부는 민정 초기인 196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박정희를 알고 지낸 것이 5년 정도였고,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군인들을 도왔고 후기로 오면서 군인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세상을 떠나기 전 김범부는 군인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경고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신생국인 한국의 정치를 선진국식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군인들에 대한 섭섭함을 나타내고 심한 꾸중을 휘두르는 글을 적어 사망하기 전 해인 1965년에 발표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박정희와 군사정권 실세들이 범부의 화랑정신과 건국사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셨다. 사실, 이 대목에서 조금 혼란스러운데, 범부가 신라나 화랑정신, 건국사상 등을 들고 나왔지만, 어쩌면 이것은 애초부터 군사정권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민족 서사’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김범부는 군인들을 단단히 믿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믿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김범부는 4·19 이후의 혼란을 매우 우려하고 있었고 기성 정치인들을 불신했다. 그들이 혼란을 극복할 의지나 능력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군인들이 나서주니 고마운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심리는 당시 김범부뿐 아니라 장준하와 함석헌 같은 사람들도 공유하는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의 글이 지금도 남아 있다.

서울시민도 5·16 아침에 군의 탱크를 보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당시의 언론이 보도했다. 5·16 초기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물론 김범부는 순진한 면도 있었다. 자신의 신라, 화랑정신, 건국사상 등의 서사는 처음부터 군인들에 먹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의 김범부로서는 급한 마음에 물건을 덥석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시점에서 나는 질문의 취지에 동의한다.”

△사상도 태어나고 죽는다. 그런 점에서, 범부가 지녔던 건국사상의 총체를 들여다보는 일과 함께, 그 사상의 현재성을 점검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본다. 범부가 제안했던 사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유효하다면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김범부가 세상과 하직한 지 반세기가 지났다. 2016년에는 50주기 기념 학술심포지엄도 열렸다. 그런데 지금도 김범부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몇 년 전에 이화여대의 최준식 교수가 「내가 만난 명문장-다시 불러내야 할 한국인의 신기(神氣)」라는 칼럼을 집필하면서 김범부의 문장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글에서 최준식 교수는 김범부의 ‘최제우론’을 인용하고 있었다. 나는 2014년에 『김범부의 건국사상을 찾아서』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은 김범부의 글을 쉬운 우리말로 풀어쓴 것이었다. 몇 해 전에 출판사에서 연락이 오기를 책을 한 번 더 찍게 됐으니 고칠 데가 있으면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누군가 지금도 김범부를 읽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알기로 김범부는 미래 지향적인 지식인이었다. 먼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는 오늘 우리 사회가 제기하는 여러 문제에 대해 그 해답을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적 경험 가운데서 구했다. 김범부에게 풍류정신, 화랑,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이 중요했던 이유가 있었다. 나는 김범부의 방법론을 유일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앞으로 김범부의 사상은 더욱 발전시켜 가야 할 것이다. 어떻게 발전시켜 가면 좋을까에 대한 방안은 지금 당장은 떠오르지 않는다. 나뿐 아니라 여러 사람의 지혜가 요구되는 부분이다.”

△올해 82세다. 교수직에서 물러난 이후에 ‘범부의 삶과 사상’을 추적해왔던 일은, 개인으로서도 영광스러운 일이고, 한국 지성사회의 일원으로서도 뿌듯한 공적 탐색일 듯하다.
“어느덧 늦은 나이에 이르렀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됐다. 사실 김범부 연구는 나에게 과분한 영역이었다. 개인적인 준비로 보아 감당하기 벅찬 과제였다. 그러니 성과물에 빈틈이 많이 나타나 있을 것이다. 나의 부족함을 딛고 후배들이 또 다른 개척에 나서줄 것이라고 믿는다.”

최익현 편집기획위원 editor@kyosu.net
[ 신문서평 리스트]